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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10.31 17:14 수정 : 2005.10.31 17:33

2001년 열차를 타고 온 나라를 돌며 ‘1인 반미시위’를 벌인 정순택 선생은(아래 사진). 외부 활동이 어려울 정도로 건강이 악화되자 집필·연구 활동에 주력했다.(위쪽 사진)

[제2창간] 장기수 고 정순택님 한겨레통일재단에 ‘전재산’ 기증

눈 감고서야 고향땅 밟은 당신의 뜻
‘오늘보다 나은 내일’ 만드는 일에
귀하게 귀하게 쓰겠습니다

정순택 님을 기억하십니까. 병들어 눈감고 나서야 북녘 고향 땅으로 갈 수 있었던 장기수 선생님 말입니다. 정 선생이 400만 원을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남겼습니다. 이는 9월30일 췌장암으로 ‘한 많은 장기수의 삶’을 마감한 그의 ‘전 재산’입니다.

정 선생은 1989년 한겨레 발전기금으로 50만 원을, 지난 7월엔 제2창간 기금으로 50만 원을 낸 바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면서 전 재산을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기증함으로써, 한겨레에 대한 애정과 통일에 대한 꿈을 오롯이 전한 셈입니다.

북쪽에 남아 있는 4명의 아들을 대신해 장례식 상주 노릇을 한 조카 정태석(64) 님은 “9월 하순 당신께 암으로 회생하실 수 없다는 것을 알리고 400만 원을 북에 있는 큰아들 태두에게 전달할까 여쭸다”며 “그러나 당신은 ‘그럴 필요 없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에 기증하라’고 말씀하셨다”고 고인의 뜻을 전했습니다. 대신 김책공대 부학부장인 큰아들 등 4명의 아들에게는 그의 뜻에 따라 <족보>와 시조인 송강 정철 이래 조상들의 글자 모음집인 <오천세목>이 전달됐습니다. “자식에게 금전이 아닌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남겨주고 싶다”는 정 선생의 마음을 드러낸 것으로 이해됩니다. 제2창간을 하는 한겨레에 발전기금을 내고, 독자배가운동에 나선 많은 이들의 바람과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현대사의 질곡을 떠안고 오랜 수형생활을 하던 정 선생에게 “민족의 화해에 기여하는 신문”인 <한겨레>의 창간은 한 줄기 빛이었습니다. 그는 1948년 상공부 공무원으로 재직하던 중 월북해 북쪽에서 기술자격심사위원회 책임심사원으로 일했으며 58년 남파됐습니다. 이후 체포돼 89년 12월 전향 뒤 가석방될 때까지 31년5개월 동안 복역했습니다. 그 시기는 정 선생뿐 아니라 남과 북 전체가 민족을 가장 큰 적으로 삼았던 ‘감옥’에 갇혀 있던 때였습니다. 당시 교도관이 던져준 <한겨레> 창간호를 본 그는 구치소 안에서 <한겨레>를 구독하기 위해 3일간 단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질곡의 현대사’를 몸소 경험한 그는 <한겨레>를 그냥 활자들이 아니라 “민족의 화해를 향해 소리치는 외침”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지난 6월 한겨레신문사를 방문해 발전기금을 내고 환하게 웃던 정 선생은, 3개월 뒤 눈을 감고나서야 북으로 돌아갔다.
정 선생은 지난 7월 <한겨레> 제2창간 기금을 내면서 “북녘에 있는 큰아들과 한겨레신문을 함께 볼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80을 넘은 나이와 오랜 수형생활, 전향을 강요하던 고문, 북녘의 가족에 대한 그리움 등은 그 꿈을 지켜볼 시간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은 남은 민족에게 “이제 막 벗어나기 시작한 분단의 감옥에서 온전히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겨레통일문화재단은 유증받은 돈을 정 선생의 염원이었던 “우리 민족이 분단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일”에 사용할 것입니다.

김보근/한겨레통일문화재단 사무총장 tree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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