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4.17 06:59
수정 : 2019.04.17 06:59
‘소유-경영 분리’ 해묵은 싸움 재점화
노조 비대위 구성 ‘방송 독립’ 공론화
‘소유-경영 분리’ 지주사 전환 11년
콘텐츠 수익 유출 자회사만 배불려
노사, 한달 전 ‘수익구조 정상화 합의
윤 회장, 합의 뒤집고 이사회 장악
대주주 견제세력 쳐내는 조직개편
마지막 보루 ‘사장 임명동의제’ 흔들
노조, 오늘 윤 회장 등 검찰 고발 예정
이명박 정부 이후 시민사회 논의가 <한국방송>(KBS)·<문화방송>(MBC) 등 공영방송의 지배구조 개선과 공영방송 정상화에 집중하는 동안 지상파 민영방송 <에스비에스>(SBS)에선 대주주 전횡에 맞서 ‘소유-경영’ 분리와 ‘독립 방송’을 위해 지난한 싸움을 벌이고 있다. 전국언론노조 에스비에스본부는 지난 4월 초부터 기자협회·피디협회 등 사내 6개 직능단체와 함께 ‘윤석민 태영건설 회장의 에스비에스 사유화 저지와 독립 경영 사수를 위한 범에스비에스 비상대책위원회’(비대위)를 꾸려 대주주 비리 의혹 등을 제기하며 ‘방송의 공공성과 독립성 지키기’를 공론화하기 위해 분투중이다.
■ 에스비에스 수익 유출 논란 노태우 정권 때 태영의 컨소시엄으로 민영방송 설립을 허가받고 1991년 12월 개국한 에스비에스는 대주주인 윤세영·윤석민 부자의 잦은 경영 개입으로 방송에 재투자해야 할 에스비에스 콘텐츠 판매 수익이 부당하게 빼돌려졌다는 비판이 끊이지 않았다.
윤세영 명예회장은 이명박 정권 당시 ‘보도지침’으로 4대강 사업에 대한 비판 보도를 막고, 박근혜 정권 땐 보도국 간부들을 불러 정권을 비판하지 말라는 지시를 하는 등 보도 개입 논란까지 불거졌다. 결국 윤 회장은 2017년 9월 “소유와 경영을 완전히 분리하고 경영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다”는 담화문을 발표하며 아들과 함께 동반 퇴진했다. 한달 뒤 노사는 방송사 처음으로 ‘사장 임명 동의제’에 합의했다. 이를 바탕으로 지난 2월 에스비에스 노사와 지주회사인 미디어홀딩스는 에스비에스의 방송 프로그램 유통회사인 에스비에스콘텐츠허브(콘텐츠허브)의 홀딩스 지분 65%를 에스비에스에 매각하여 ‘에스비에스를 중심으로 한 콘텐츠 생산 유통 체계를 완비한다’는 수익구조 정상화에 3자 합의를 했다. 에스비에스는 회사채를 발행하여 809억원을 주고 콘텐츠허브를 사들이며 경영권을 가져왔다. 노조는 2월21일 노보를 통해 “10년 투쟁의 결실로 그동안의 갈등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의미를 부여했다.
그러나 한달 뒤 대주주가 돈만 챙기고 경영권은 사실상 내놓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노조는 “자회사 콘텐츠허브 이사회를 장악한 윤석민 부회장이 태영건설 회장 취임 뒤 에스비에스 이사회에 자기 사람 위주로 직할체제를 구축하며 합의를 저버렸다”고 반발한다. 노조원들은 지난달 28일 이사회 저지 투쟁을 벌였으나 윤 회장 체제의 조직개편안 통과는 강행됐다. ‘독립 경영’에 앞장서며 대주주를 감시하던 저항세력을 제거한 이번 인사에 대해 방송사 안팎에선 “앞으로 보도 쪽의 방송 독립을 상징하는 인물들도 내쳐지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 한달 만에 합의 뒤집은 이유는 윤창현 언론노조 에스비에스본부장은 “에스비에스는 중요한 공적 책무를 수행하는 방송사인 동시에 1500명의 생존권이 달린 공동체이나 윤 회장은 ‘내 것’이라는 생각이 강하다”며 “윤 회장이 방송사에서 편성권만 독립시키면 되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경영이 독립돼야 편성도 독립될 수 있다. 향후 돈 되는 것은 다 빼내가 조직이 망가질 것”이라고 비판했다.
홀딩스 쪽은 합의가 깨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노조는 “앞에선 합의해놓고 뒤에선 합의를 무력화시키는 행위”라고 반박한다. 사내에선 최근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 하락도 정권 눈치를 보던 윤석민 회장 쪽에서 반전 기회로 삼은 것 아니냐는 분석도 있다.
에스비에스에선 대주주에게 ‘소유-경영 분리’ 압박과 투명 경영을 견인하기 위해 도입한 지주회사 체제에 대한 자성론도 나온다. 사회적 합의 속에 2008년 출범한 지주회사 체제는 에스비에스 독립 경영을 불러오기는커녕 종속을 더 심화시키고 방송사가 단순 콘텐츠 생산기지로 전락한 모양새다. 한 피디는 “지주회사 체제에서 콘텐츠를 생산하는 에스비에스는 적자에 허덕이고 콘텐츠허브 등 자회사 배만 불려 결국 이득이 지주회사에 넘어가게 하는 합법적 통로를 만들어준 꼴”이라고 진단했다.
비대위는 감사 자료를 바탕으로 대주주의 비리 의혹을 잇따라 폭로했다. 지난 9일엔 지주회사인 홀딩스의 자회사 콘텐츠허브가 윤세영 회장의 최측근인 이재규 태영건설 부회장의 ‘가족기업’에 13년간 200억원대의 일감을 몰아줬다는 주장에 이어 11일엔 태영건설 간부 아들이 콘텐츠허브에 부정 취업했다는 의혹도 제기했다. 태영건설이 공적 책무를 져야 하는 지상파방송의 지배주주로서 도덕성 등 자격이 합당한지 따져묻는 것이다.
비대위는 지난 4일 결의대회에서 윤석민 회장의 공개 사과와 재발 방지, 조직 개편안과 인사안 전면 철회 등 4개항을 요구했다. 사쪽은 이에 대해 수용 불가를 밝힌 뒤 지금까지 입장 변화가 없는 상황이다. 노조 쪽에선 마지막 남은 대주주 견제장치인 ‘임명동의제’도 최근 사쪽 고위 인사들의 ‘파기’ 발언이 잇따랐다며 방송 장악 시도가 다시 가시화되는 것으로 본다. 이에 노조는 17일 윤석민 회장과 이재규 부회장, 유종연 전 콘텐츠허브 사장을 업무상 배임과 공정거래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고발할 계획이다.
이런 해묵은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방송 규제기관인 방송통신위원회의 역할이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민주언론시민연합 공동대표인 정연우 세명대 교수는 “윤세영 회장이 퇴진하며 일체의 경영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천명한 것처럼 경영은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제작·보도 부문의 내적 자율성을 보장하는 쪽으로 가야 한다”며 “방통위는 에스비에스의 공정성·독립성이 위협받지 않도록 재허가·재승인 심사에서 독립 경영을 평가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짚었다.
문현숙 선임기자
hyunsm@hani.co.kr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