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무렵 남편은 국군 장교로 우익에, 초등학교 교장이던 시동생은 집안과 문중을 지키기 위해 공산당에 동조해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그 까닭에 인민군이 들어올 때는 남편 때문에, 국군이 들어올 때는 시동생 때문에 양쪽에서 시달려야만 했다. 남편은 전쟁 중 신안군 지도 부근 공산당원들에게 잡혀 몰매를 맞고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다행히 근무지인 지도 공산당 간부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은 후퇴하기 전 시동생에게 지역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했다. 시동생은 이 명령에 도저히 따를 수 없어 버티다 결국 공산군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힌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공산군 철수 후에도 남편은 공산당에 동조했던 시동생 때문에 한동안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은 국군 장교이므로 숨어 지낼 이유가 없다며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3남2녀(1녀는 어려서 사망) 자식들과 만삭의 홍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순찰대원으로 순찰 나갔다가 총에 맞은 것이다. 남편을 잃고 57년을 홀몸으로 5남매를 키워온 홍씨한테 남편과 시동생의 질곡 많고 기막힌 인생은 그후 오랫 동안 자식들에게도 유전돼 우여곡절과 상처를 남겼다. 막내 기선씨가 77년 유신반대투쟁과 80년 신군부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현역 소령이던 세째 성수씨는 보직을 받지 못한 채 결국 군복을 옷을 벗어야 했다. 또 사업을 하던 사위는 당국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결국 중고교 시절 탁구선수 출신의 딸과 이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홍씨는 그때마다 억울하게 숨져간 남편 생각하며 꿋꿋이 견뎌냈다. 홍씨는 4년 전 엉치뼈에 이상이 생겨 인공관절로 견디면서도 정신만은 맑았다고 한다. 홍씨는 22일 무안군 일로읍 죽산리 일명 ‘도둑촌’ 남편 옆에 57년 만에 누웠다. 유족들은 홍씨 뜻을 따라 부의금 가운데 일부를 장학금으로 기탁하기로 했다.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궂긴소식 |
고 홍양남씨…우익 남편에 공산당 시동생 |
6·25 무렵 남편은 국군 장교로 우익에, 초등학교 교장이던 시동생은 집안과 문중을 지키기 위해 공산당에 동조해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그 까닭에 인민군이 들어올 때는 남편 때문에, 국군이 들어올 때는 시동생 때문에 양쪽에서 시달려야만 했다. 남편은 전쟁 중 신안군 지도 부근 공산당원들에게 잡혀 몰매를 맞고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다행히 근무지인 지도 공산당 간부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은 후퇴하기 전 시동생에게 지역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했다. 시동생은 이 명령에 도저히 따를 수 없어 버티다 결국 공산군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힌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공산군 철수 후에도 남편은 공산당에 동조했던 시동생 때문에 한동안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은 국군 장교이므로 숨어 지낼 이유가 없다며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3남2녀(1녀는 어려서 사망) 자식들과 만삭의 홍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순찰대원으로 순찰 나갔다가 총에 맞은 것이다. 남편을 잃고 57년을 홀몸으로 5남매를 키워온 홍씨한테 남편과 시동생의 질곡 많고 기막힌 인생은 그후 오랫 동안 자식들에게도 유전돼 우여곡절과 상처를 남겼다. 막내 기선씨가 77년 유신반대투쟁과 80년 신군부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현역 소령이던 세째 성수씨는 보직을 받지 못한 채 결국 군복을 옷을 벗어야 했다. 또 사업을 하던 사위는 당국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결국 중고교 시절 탁구선수 출신의 딸과 이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홍씨는 그때마다 억울하게 숨져간 남편 생각하며 꿋꿋이 견뎌냈다. 홍씨는 4년 전 엉치뼈에 이상이 생겨 인공관절로 견디면서도 정신만은 맑았다고 한다. 홍씨는 22일 무안군 일로읍 죽산리 일명 ‘도둑촌’ 남편 옆에 57년 만에 누웠다. 유족들은 홍씨 뜻을 따라 부의금 가운데 일부를 장학금으로 기탁하기로 했다.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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