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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4 18:45 수정 : 2006.02.24 18:53

“용희형 맨날 받기만 하고 그랬는데, 우리 천국에서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냅시다. 낚시도 하고…”

“어머님 부디 다음 세상 더좋은 곳에서 만나요. 사랑해 엄마. 불효자 올림.”

“空手來 空手去”

“아버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경기도 벽제 장례예식장 해우소에 적혀있는 낙서글들입니다. 죽음 앞엔 지위의 높고 낮음도, 부의 많고 적음도 별 의미가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선 누구나 겸손해집니다. <한겨레> 사람면은 보통사람 가운데 조금은 특이한 삶을 살다간 분들의 이야기를 실으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제보 기다립니다.

“아가, 몸은 괜찮냐? 걱정 마라. 남자가 소신껏 한 일인데, 5년이면 어떻고 10년이면 어떠냐.”

지난 18일 89세로 별세한 홍양님씨는, 30년 전 유신반대 투쟁을 하다 감옥에 갇힌 대학생 막내 아들을 면회 와, 걱정하는 아들을 되레 위로하고 돌아갔다. 이 아들(현재 열린우리당 배기선 의원)은 홍씨가 32살 되던 1950년 전쟁 직후 육군 소위로 근무하다 숨진 남편 사이에 둔 유복자였다. 1917년 전남 무안군 일로읍 감돈리에서 태어난 홍씨는 열일곱에 한살 어린 경주 배씨 집안에 시집와 생전 4남1녀를 두었다.


6·25 무렵 남편은 국군 장교로 우익에, 초등학교 교장이던 시동생은 집안과 문중을 지키기 위해 공산당에 동조해 인민위원장을 맡아야 했다. 그 까닭에 인민군이 들어올 때는 남편 때문에, 국군이 들어올 때는 시동생 때문에 양쪽에서 시달려야만 했다. 남편은 전쟁 중 신안군 지도 부근 공산당원들에게 잡혀 몰매를 맞고 생명을 잃을 뻔 했다. 다행히 근무지인 지도 공산당 간부 도움으로 가까스로 목숨은 구할 수 있었다. 그것도 잠시, 마을을 점령하고 있던 공산군은 후퇴하기 전 시동생에게 지역 주민들을 모두 학살하라는 명령했다. 시동생은 이 명령에 도저히 따를 수 없어 버티다 결국 공산군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힌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공산군 철수 후에도 남편은 공산당에 동조했던 시동생 때문에 한동안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은 국군 장교이므로 숨어 지낼 이유가 없다며 집으로 돌아온 그날 밤 3남2녀(1녀는 어려서 사망) 자식들과 만삭의 홍씨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순찰대원으로 순찰 나갔다가 총에 맞은 것이다. 남편을 잃고 57년을 홀몸으로 5남매를 키워온 홍씨한테 남편과 시동생의 질곡 많고 기막힌 인생은 그후 오랫 동안 자식들에게도 유전돼 우여곡절과 상처를 남겼다.

막내 기선씨가 77년 유신반대투쟁과 80년 신군부에 의해 감옥에 들어가면서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현역 소령이던 세째 성수씨는 보직을 받지 못한 채 결국 군복을 옷을 벗어야 했다. 또 사업을 하던 사위는 당국의 괴롭힘을 견디다 못해 결국 중고교 시절 탁구선수 출신의 딸과 이혼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그러나 홍씨는 그때마다 억울하게 숨져간 남편 생각하며 꿋꿋이 견뎌냈다. 홍씨는 4년 전 엉치뼈에 이상이 생겨 인공관절로 견디면서도 정신만은 맑았다고 한다. 홍씨는 22일 무안군 일로읍 죽산리 일명 ‘도둑촌’ 남편 옆에 57년 만에 누웠다. 유족들은 홍씨 뜻을 따라 부의금 가운데 일부를 장학금으로 기탁하기로 했다.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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