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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2.24 18:50 수정 : 2006.02.24 18:50

“용희형 맨날 받기만 하고 그랬는데, 우리 천국에서 둘도 없는 친구로 지냅시다. 낚시도 하고…”

“어머님 부디 다음 세상 더좋은 곳에서 만나요. 사랑해 엄마. 불효자 올림.”

“空手來 空手去”

“아버지 앞에 당당히 설 수 있는 아들이 되겠습니다. 지켜봐 주세요.”

경기도 벽제 장례예식장 해우소에 적혀있는 낙서글들입니다. 죽음 앞엔 지위의 높고 낮음도, 부의 많고 적음도 별 의미가 없는 듯 합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선 누구나 겸손해집니다. <한겨레> 사람면은 보통사람 가운데 조금은 특이한 삶을 살다간 분들의 이야기를 실으려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과 제보 기다립니다.

19일 오후 3시40분 노환으로 92살을 일기로 별세한 차수열씨는 50년대 강원일보에서 필명을 날린 기자출신이다. 그의 아버지(차상학)와 아들 기태(48)씨도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는 인터넷신문 <데일리안>의 편집국장이다. 기자 3대 가운데 2대가 별세한 것이다.

차씨는 1950년 강원일보에 입사한 후 정경부장, 사회부장, 편집부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재직중 고정칼럼 ‘풍문편편’을 통해 날카롭게 필봉을 휘둘렀다. 당시 강원도청과 춘천시청 등의 공무원들은 그의 글이 나오기 무섭게 신문을 구해보며 벌벌 떨었다고 동료 최종명씨는 전했다. 강원 지역은 물론 서울 지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그러나 차씨는 가정 형편이 어려워 기자생활을 10년 만에 접어야 했다. 차씨는 생전 시력이 약해져 신문을 자세히 보지는 못하지만 아들의 기사가 안보이는 날이면 “왜 네 기사가 없냐”며 묻곤 했다고 한다. 차씨는 또 요즘 신문이 발행 면수가 많은 것을 두고는 “신문이 아니라 잡지같다”거나 “문장이 너무 딱딱해졌다”고 언론계 선배로서 나름의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고 아들 기태씨는 전했다.

타계한 차씨 부친 향산 차상학 선생도 기자출신이다. 1906년부터 민족주의 성향의 <만세보> 창간 기자로 활동했다. 향산 선생은 이어 <대한신문>으로 자리를 옮겼다가 대한신문이 친일지로 변질되자 1910년 창간된 <천도교월보>에서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활동했다. 천도교월보는 교계기관지이면서도 민족성향이 강해 집필자들이 자주 투옥되고, 발행금지처분까지 받기도 했다. 향산 선생은 또 강원도 출신 기자 1호로 알려져 있다. 또 고 차수열씨의 작은 아버지(차상찬) 선생도 월간 <개벽>의 주필을 역임한 기자 출신이다.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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