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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24 20:21 수정 : 2006.03.24 20:21

[가신이의 발자취] 밥 공양 욕쟁이 통허 스님

빈소에 육십 대 노숙인 하나가 불쑥 들어섰다. ‘배가 고파서 왔다’고 했다. 자리에 앉아 있던 문상객이 얼른 일어나 접시에 돼지고기를 넉넉하게 담았다. 소주도 한병 챙겨 주었다. 다른 이는 지갑에서 만원 짜리 한장을 꺼내 노숙인에게 쥐어줬다. “통허 스님이 주는 마지막 술, 밥이니까 잘 먹으소.” “스님 참, 마지막 가는 길에도 배고픈 사람 불러들여 밥 먹여 보내시네.”

16일 밤 대구시 중구 계명대 동산의료원 장례식장 통허스님 빈소 풍경이다. 지난 몇 년 동안 대구 중구 반월당 보현사 앞 무료급식소 ‘자비의 집’에서 노숙인들에게 밥을 퍼주었으니 그럴 만도 하다.

그날 밤 스님 빈소는 승가에서 인연을 맺은 스님들과 속세에서 인연을 맺은 공무원이나 자영업자, 기자 등 다양한 이들이 지켰다. 모두들 스님 덕분에 알게 모르게 어려운 이웃을 돕는 데 손을 보태 온 이들이다. 스님은 “살만하고 있는 사람들이 나눠 써야 세상이 돌아간다”며 인연을 맺은 사람은 누구나 어려운 이웃들과 끈을 이었다. 형편 어려운 이웃이 찾아와 손 내밀면 스님은 도움 줄 만한 이들을 대뜸 찾아가 ‘좋은 일 좀 하라’고 팔을 잡아끈다. 그러면 누구도 뿌리치지 못하고 호주머니를 열고 손을 보태게 됐다. 스님은 장애인이 모여사는 집에 쌀이 떨어지면 쌀을 낼 만한 사람을 찾아가 쌀을 구해다줬다. 여기저기서 살림살이를 끌어모아 가난한 장애인 부부의 신혼살림을 차려줬다. 명절이면 신도들이 내놓는 먹거리를 혼자 사는 노인이나 아픈 사람이 있는 가정에 갖다줬다. “마이 들어온 거 남아서 주는 거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마이 묵어라!” 말투는 언제나 퉁명스러웠다. 스님을 가까이서 지켜본 이들은 그 속을 다 안다. 도움 받는 이들이 미안해하지 않도록 먼저 한 마디씩 던진다. 무료 급식을 하는 점심시간이면 스님은 험상궂은 표정으로 급식소 앞에 버티고 서 있다. 하루 300명이 넘게 찾아오는 노숙인들 중 옷이 얇아 추위에 떨거나 낡아 헤진 신발을 신은 노숙인이 있는지 살핀다. 혹시 그런 노숙인이 눈에 띄면, “왜 이러고 다니냐”고 호통치고는 옷가지며 신발을 챙겨다 줬다.

그래서 통허 스님을 아는 이들은 스님을 ‘밥 퍼주는 욕쟁이 스님’으로 불렀다. 상스러운 말도 거리낌없이 쏟아내지만 둘러앉은 이들을 울리고, 웃기는 입담이 주변에 늘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스님은 대구에서 태어나 11살 때 콜레라를 심하게 앓은 뒤 전남 장성 백양사로 출가했다. 전남 신안 도초섬 만연사 주지, 강화도 보문사 원주를 지내기도 했지만, 만년에는 절에 살지 않고 대구 중구 남산동 허름한 월세방에서 지냈다.

스님이 입적한 줄을 모르는 이웃들은 여전히 스님을 찾는다. “스님 밥 좀 주세요.” “어머니가 임종하시려나 봅니다. 염불 좀 해 주세요.” “스님, 사는 게 참 힘드네요” 라고. 그래서 경북 칠곡의 백양사에 스님을 모시고 나오는 속세의 인연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본다. 55살 너무 일찍 입적한 스님 세수가 아까워서가 아니다. 아직도 스님 손이 필요한 이웃들이 많아서다. 사람들은 스님의 ‘극락왕생’을 빌면서도 “스님, 너무 일찍 가셨어요”한다.

박주희 기자 hope@hani.co.kr, 사진 <매일신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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