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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8 18:36 수정 : 2006.04.28 18:36

[가신이의발자취] 한국축산 일으킨 황영구 선생

식민지 반대 동맹휴학 주도해 퇴학
일본 유학길서 ‘축산대국’ 꿈 꿔
한평생 농촌 과학화에 바쳐

1958년 1월 어느 해질녘, 눈보라 휘몰아치는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를 일제 낡은 트럭이 숨가쁘게 가다서다 오르고 있었다.

“길이 하도 미끄럽고 험해 저번 주에도 차 한대가 저기로 굴렀드래요.”

조수석의 황영구 농사원축산시험장 대관령지장장은 뿔테 안경 너머로 짙은 어둠에 묻히는 고갯길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춘천농업 학생이던 1932년 4월29일 일본 천왕 생일날(천장절) ‘식민지교육 반대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당한 일, 퇴학에 반대해 사표 낸 일본인 선생님 권유로 들어간 일본수의학교 시절, 해방 후 농사개량원에서 농촌 재건에 땀 흘린 10년이 스쳐갔다.

조국의 축산 미래를 열기 위해 임지로 가는 길인데 더 멀고 험한들 가지 않았으랴.

‘여기서 시작하자. 축산으로 잘사는 농촌을 만들자. 내 소임은 초목근피로 연명하는 국민에게 맛있는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는 것이다.’ 대관령 능선을 소떼 양떼가 뛰노는 푸르른 목초지로 가꾸는 방안을 찾으려 호롱불을 밝혔다. 이 불은 지난 3월1일 91살에 한국 축산계의 전설이 되기까지 꺼지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곧 한국축산사가 됐다.

“한우는 우리 민족의 풍토와 역사를 간직한 산물입니다. 자연의 분신이자 농경문화의 원조이고 민족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축산철학을 이렇게 전파했다. 1952년 중앙농업기술원에서 축산국이 분리되고 산하에 축산기술원이 신설되자 축산의 민주화시대가 열렸다며 기뻐했다. 독립된 예산과 운영권을 바탕으로, 시험축사를 짓고 초지용 땅을 사들여 시설을 갖추고 전문 인력을 확보했다. 축산 민주화는 한국전쟁 중에도 수원시험장을 화산으로 옮겨 축산시험장을 지켜낸 끝에 얻은 성과였다.

“종계, 종돈을 지키려고 동료들과 축산시험장에 남아 있었는데 이북 정권도 축산의 중요성을 알고 우리들에게 월급을 줍디다.”

1958년 1월 축산시험장 대관령지장장으로 부임한 황영구 선생(앞줄 가운데 안경쓴 이)이 송찬원(전 축협중앙회장), 오대균(전전국립종축원 대가축과장), 고 강태홍 박사 등 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자주 축산시대를 맞아 그는 축종 및 품종별 체형 수치, 농가 의견을 반영한 개량목표 설정 등 제안들을 쏟아냈다. ‘자주 축산’은 1958년 농산국에 흡수되면서 암흑기를 맞았지만, 당시 제안들은 오늘날 축산 정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박정희 정부에서 농림부 축산국장으로 1차경제개발계획 축산분야 중·장기계획을 진두 지휘했다. 하지만 1968년 정부가 초지 등을 국유지로 포함시켜 다른 용도로 사용하거나 민간에 불하해 어렵사리 갖춘 축산연구 기반이 무너져 내리자 이듬해 농림부를 떠난다. 민간으로 옮긴 그는 낙농육우협회, 종축개량협회를 이끌었다.

“축산법이 축산 농민을 규제하고 있다. 정책은 사육 현장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 육질을 개량하고 공정한 유통 과정이 바로 서면 한우 농가에는 희망을, 소비자에게는 믿음을 주고 국제 경쟁력도 높아져 세계무역기구 체제의 다자간 협상 파고도 넘을 수 있다.” 저서 〈축산업과 인류사〉(1999년)에서.

“시험연구기관 종사자의 사명은 농촌을 과학화하고 경영구조를 개선하는 일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됩니다. 실패와 잘못을 반성하고 연구해 좋은 성과를 얻어 농민에게 하나라도 줄 수 있다면 ….” 유학 떠나는 후배들을 배웅하며 잊지 않던 그의 당부였다.

송인걸 기자 igs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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