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발자취] 한국축산 일으킨 황영구 선생
식민지 반대 동맹휴학 주도해 퇴학일본 유학길서 ‘축산대국’ 꿈 꿔
한평생 농촌 과학화에 바쳐 1958년 1월 어느 해질녘, 눈보라 휘몰아치는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를 일제 낡은 트럭이 숨가쁘게 가다서다 오르고 있었다. “길이 하도 미끄럽고 험해 저번 주에도 차 한대가 저기로 굴렀드래요.” 조수석의 황영구 농사원축산시험장 대관령지장장은 뿔테 안경 너머로 짙은 어둠에 묻히는 고갯길을 바라보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춘천농업 학생이던 1932년 4월29일 일본 천왕 생일날(천장절) ‘식민지교육 반대 동맹휴학’을 주도해 퇴학당한 일, 퇴학에 반대해 사표 낸 일본인 선생님 권유로 들어간 일본수의학교 시절, 해방 후 농사개량원에서 농촌 재건에 땀 흘린 10년이 스쳐갔다. 조국의 축산 미래를 열기 위해 임지로 가는 길인데 더 멀고 험한들 가지 않았으랴. ‘여기서 시작하자. 축산으로 잘사는 농촌을 만들자. 내 소임은 초목근피로 연명하는 국민에게 맛있는 고기를 실컷 먹게 해주는 것이다.’ 대관령 능선을 소떼 양떼가 뛰노는 푸르른 목초지로 가꾸는 방안을 찾으려 호롱불을 밝혔다. 이 불은 지난 3월1일 91살에 한국 축산계의 전설이 되기까지 꺼지지 않았다. 그의 일생은 곧 한국축산사가 됐다. “한우는 우리 민족의 풍토와 역사를 간직한 산물입니다. 자연의 분신이자 농경문화의 원조이고 민족의 보호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후배들에게 축산철학을 이렇게 전파했다. 1952년 중앙농업기술원에서 축산국이 분리되고 산하에 축산기술원이 신설되자 축산의 민주화시대가 열렸다며 기뻐했다. 독립된 예산과 운영권을 바탕으로, 시험축사를 짓고 초지용 땅을 사들여 시설을 갖추고 전문 인력을 확보했다. 축산 민주화는 한국전쟁 중에도 수원시험장을 화산으로 옮겨 축산시험장을 지켜낸 끝에 얻은 성과였다. “종계, 종돈을 지키려고 동료들과 축산시험장에 남아 있었는데 이북 정권도 축산의 중요성을 알고 우리들에게 월급을 줍디다.”
1958년 1월 축산시험장 대관령지장장으로 부임한 황영구 선생(앞줄 가운데 안경쓴 이)이 송찬원(전 축협중앙회장), 오대균(전전국립종축원 대가축과장), 고 강태홍 박사 등 직원들과 기념 촬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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