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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5.12 20:22 수정 : 2006.05.12 20:22

[가신이의 발자취] 원로 성우 김진동씨

형님! 김진동 형님!! 이제 다 끝났습니다. 예순여섯 짊어지고 온 병든 육신 탁탁 접어서 허공에 뿌리고 질나래비 훨훨 아픔도 미움도 추위도 더위도 없는 천상의 세계로 가십니다. 많은 시간 가까운 거리에서 같이 웃고 같이 울던 세월의 자락에서 항시 궁금했던 것은 서릿발 같은 준엄함, 그 올곧은 당당함, 봄바람같이 살랑거리는 온화함, 그것들은 다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고지식한가 하면 여유롭고 넉넉한가 하면 칼날 같고, 그래서 남산골 딸깍발이처럼 꼬장꼬장하면서도 어깨춤 들썩이는 풍류는 또 어땠습니까? 꽹과리, 장구채 잡고 한바탕 돌아가는 품새며 색소폰이면 색소폰, 기타면 기타 잡기만 하면 흐드러지게 질펀한 걸 보면 그걸 난봉기라고 해야 하나요? 흘러간 노래 〈전선야곡〉을 당신같이 맛있게 부르는 사람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고음으로 올라가서 한 자락 탁 꺾일 때면 같은 사내라도 오금이 찔끔 저려왔습니다. ‘성우수첩’을 들여다보면 동네 강아지도 차고 다닌다는 휴대폰 하나 없이 마치 원시인같이 고집부리는 모습이 보입니다. 지금이 어느 땐데 텔레비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직 라디오만 고집하며 남의 방송 내 방송 다 듣고, 집합 한 시간 전에 와서 빨간 모나미 볼펜으로 다섯번 열번 정독하면서도 흐트러짐 없는 단정한 모습으로 앉아 계셨습니다.

멋들어지게 꺾어 부르시던 ‘전선야곡’
늘 방송 1시간 전부터 연습하던 성실함
병에도 소명을 다하던 외고집…그립습니다

써주니까 읽고, 목소리가 있어서 성우가 아니라 세월이 오래돼서 관록이 아니라, 글 한줄 한줄에도 사람 냄새 미세한 마음의 움직임조차 잡아내어 형상화하는 그를 일러 입신의 경지라고 부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자신은 재주가 부족하고 용렬하여 남들의 몇배를 노력해야 한다는 그 가식 없는 노인의 외고집. 그것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것인지 케케묵은 낡은 유습으로 치부해야 하는 것인지 그건 각자의 몫입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쓰러졌을 그 병든 몸을 칼날 같은 영혼으로 지탱함에 유명을 달리하기 며칠 전까지도 혼신의 힘으로 방송을 하던 당신. 그러면서도 숨차고 병든 목소리가 작품에 누가 될까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까 노심초사하던 당신, 그래도 얼마나 행복합니까. 당신이 그렇게도 사랑하던 성우의 길을 마지막까지 달려가지 않았습니까?

십오륙년 전, 아니 이십년 전일 겁니다. 늙으면 찾아가서 그곳에서 살겠다던 당신의 고향 계룡산 신도안이 전두환 정권의 징발로 사라지게 되자 병은 그때부터 시작인 듯했습니다. 들끓는 울분을 가슴에 담고 마치 실향민처럼 상심한 모습을 보면 계룡산 신도안은 당신의 어머니이고, 당신의 신앙인 듯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을 꼭꼭 씹어가면서, 소박한 밥상 가벼운 주머니로 누구 부럽지 않게 귀족 같은 기개로 살아오셨습니다. 개똥밭에 굴러도 저승보다는 이승이 낫다고 합니다. 진실이라는 기둥 하나 세우고 헐떡거리며 살아온 이승의 세월이 너무나도 애절하고 애처롭습니다. 이제 고집스럽던 그 삶의 나래 다 접으시고 당신의 맑고 곱고 당당한 영혼, 천상의 노래 속에 안식하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이 인간세에 오지 마십시오.

왜냐고요? 혹시나 그 외롭고 고운 영혼이 또 한번 상처받을까 걱정이 되어섭니다. 그리고 당신의 진실 때문에 우리의 부정직이, 불성실이, 간교함이 부끄럽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가는 길, 천상병 시인의 ‘귀천’으로 배웅하고자 합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둘이서/가슴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면은/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한국성우협회 후배 일동

△ 1942년 6월27일 충남 논산군 두마면 용동리 420 출생

△ 대전실업초급대 경영학과 졸업

△ 1967년 6월1일 동아방송 3기(KBS 9기)로 성우 입문

△ 2006년 4월26일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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