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발자취] 카자흐스탄 ‘고려일보’ 양원식 전 주필
5월9일 아침 6시30분, 카자흐스탄 옛 수도 알마티의 한 병원에서 노신사가 눈을 감았다. 74살 생일을 꼭 열흘 앞두고서다. 내달이면 창간 83돌을 맞는 〈고려일보〉 양원식 전 주필이 굴곡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그는 이틀 전 귀가중 아파트 입구에서 복면 강도에 머리를 둔기로 맞고 병원으로 옮겨진 후 ‘레테의 강’ 저편으로 건너갔다. 1961년 결혼한 열살 아래 부인 양루드미라와 쌍둥이 두아들, 손녀들을 남긴 채. 1932년 평남 안주에서 태어난 그는 중앙아시아 이국땅의 겨레말과 우리문화 지킴이였다. 최근에도 〈고려일보〉 한글판 편집을 맡았다. 1953~58년 모스크바 소련국립영화대에서 영화를 전공한 그는 볼가그라드에서 60년까지 영화감독과 텔레비전 카메라감독으로 일한다. 양 주필은 60년, 북한 귀국을 포기하고 옛 소련에 남기로 결심한다. 작년 초여름 남한을 처음 방문하기까지 그는 “70평생 타향에서 고향산천 그리움에 몸서리쳤다”고 했다. 그는 국립영화촬영소 기록영화 감독을 맡아 60여편의 기록·예술영화를 제작했다. 양 주필은 97년엔 모스크바 유럽종합대서 언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3·4세 고려어 몰라…모국어 잇기 힘써한글로 시·글 쓰며 한평생 향수 달래 양 주필이 〈고려일보〉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4년 이 신문 전신인 〈레닌기치〉 문화예술부장으로 일하면서부터. 고려일보는 동포언론의 구심점 역할을 해왔던 터여서 그에게 무척 매력적인 직장이었다고 한다. 고려일보는 1923년 연해주에서 〈아방가르〉(선봉) 제호로 창간해 항일정신을 고취해왔다. 37년 스탈린이 고려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키자 함께 옮겨가 38년 〈레닌기치〉로 속간된다. 1991년 옛 소련 해체 후 지금 제호로 바뀌어 매주 러시아판 8개 면과 한글판 4개 면을 발행하고 있다. 2003년 6월 창간 80돌 행사때 만난 양 주필은 “이민 3, 4세 대부분 고려어를 몰라 한글판 독자가 점점 줄어 걱정”이라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1991~2000년 고려일보 사장을 지낸 후 경영난을 못이겨 현재 사장인 채유리씨에게 넘기고 고문·주필 등을 맡아왔다. 고국에 대한 향수를 고스란히 시와 글에 담는 게 그의 유일한 취미였다. 소련작가동맹 회원, 국제펜클럽 회원, 카자흐스탄 작가동맹 산하 고려분과 회장 등이 생전 문학계 직함이었다. 반 세기 넘는 세월을 중앙아시아 초원에서 살면서 보고 듣고 겪은 고려인의 수난·고초·민족의식·고독·향수를 시로 옮기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고 김성조(60) 전 〈고려일보〉 편집국장은 말한다. 그것은 “모국어인 한글을 잇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지난해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한 제3회 재외동포기자대회에 참석해 금강산에 오른 양 주필은 “고국을 떠나보지 않은 사람들은 풀 한포기, 물 한방울, 돌멩이 하나가 얼마나 소중한지, 얼마나 눈물을 자아내는지 모를 거”라고 했다. 양 주필은 2002년 서울의 자그마한 출판사(시와 전설)에서 시집을 냈다. 〈카자흐스탄의 산꽃〉. 그는 서문에서 “소비에트 시절에는 국가가 어느 정도 도와줘 작가들이 드물게나마 책을 펴낼 수 있었는데,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시장경제 체제로 넘어오면서 돈 없는 사람이 책 펴내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어서 나의 글이 모국어 시집으로 세상에 태어나게 돼 감개무량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는 시 ‘천당’에서 “… 나는 믿는다/만일 천당이 없다면/이 지옥 남겨두고 간/숱한 사람들이/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라고 했다. 양 주필은 자신의 시집 마지막에 실린 대로 ‘카자흐 초원’에서 모국어로 시지으며 향수를 달래고 있을 듯 싶다. “어머님 품 마냥 한없이 넓은 초원/밤하늘 별나라 바라볼 때면 구수한 들쑥냄새/달콤한 꿈까지 보게 됩니다/이역살이 괴로움도 잊게 됩니다.” 이상기 기자 amigo@hani.co.kr
2003년 6월29일 창간 80돌을 맞아 알마티 한국문화원 앞에서 고려일보 직원들이 한국기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다. 뒷줄 왼쪽에서 7번째가 양원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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