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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02 21:41 수정 : 2006.06.02 21:43

[가신이의 발자취] 이병두 문화부 국제관광과장

그가 그립다. 아주 많이 그립다. 2002년 월드컵 준비로 모두 바쁠 때 그는 관광정책과 주무서기관으로 관광 분야를 도맡아 처리했다. 거의 혼자 다했다고 할 만큼 그렇게 일을 끌어안고 했다. 워낙 남한테 싫은 소리 안하고 자기가 짊어지는 성격 때문에 같이 일하는 사람들은 편하다. 그가 다 해주니까. 그러곤 과장으로 옮겼는데 위암 말기 선고를 받은 것이다. 더부룩하고 꽉 찬 듯한 배를 움켜쥐고 일만 하다가 통증을 느꼈을 때는 너무 늦어버린 것이다. 좀 쉬라는 주위 동료들 권유에 1년 정도 소속기관에 있더니, 아무래도 자기 전공분야를 살려 일을 좀더 해야겠다고, 몸도 다 나은 것 같다고 하면서 기어코 그 바쁜 국제관광과장직을 수행했다. 하필 그해 중요한 국제회의는 왜 그렇게 많았는지….

그는 국제무대에서 더 알려져 있다. 국제회의에서 영어로 토론하면서 손으로는 그 내용을 노트북에 한글로 입력한 뒤 그 자리에서 전자우편으로 본국에 보고하는 사람이다. 마드리드에 있는 세계관광기구(WTO)에서 3년간 근무할 때는 주어진 일 하기에도 힘들어 하는 마케팅 부서에서 세계관광 흐름에 관한 보고서를 자신의 이름으로 시리즈로 발간하였다. 파견 근무가 끝날 무렵에는 관광기구 사무총장이 귀국하지 말고 같이 일하자고 강요에 가까운 권유를 할 정도였다.

위암 선고받고도 전공살려 더 바쁜 부서로
장기 기증·몸은 수목장 등…다 주고 간 사람

이병두 과장이 지난해 4월 국제관광과 직원들과 강원도 화천군 ‘토고미’ 생태환경마을 답사 중 찍은 사진.

지적 호기심이 누구보다 강해서 궁금한 분야가 있으면 언제나 학습하고 습득한 지식은 현장에서 실천했다. 그에게 일과 학습은 늘 함께였다. 그래서 그는 늘 자기 분야에서 앞선 사람이었고 일정 시간이 지나면 경쟁자가 없게 되었다. 대학에서 행정학을 전공했으면서도 영국 유학 시절에는 문화연구, 예술경영 등 두 개의 석사를, 다시 국내에서 관광학 석사를 했다. 현직에 있으면서 세 분야의 석사학위를 딴 것이다. 그런 까닭인가, 그는 늘 많은 일을 했다. 주변 사람들 모두를 편하게 해주면서.

이병두 과장. 그는 1962년 1월2일 충북 영동에서 태어났다. 경북대를 거쳐 1988년 제31회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예술국, 종무실, 기획관리실, 관광국 등 문화관광부의 여러 부서를 거쳤다. 우리는 그를 ‘예술가적 행정가’ ‘문화관광 행정의 10단’이라고 부르곤 했다.

그러나 그가 이토록 그리운 건, 이 글을 쓰면서도 눈물이 앞을 가리는 것은, 그의 출중한 행정능력 때문만이 아니다. 주위 사람들을 돌아보고 아끼고 짐을 대신 져주는 그의 아름다운 마음씨, 그 마음씨 때문이다. 어렵고 아쉬운 일들을 늘 혼자 나서서 짊어지고 가던 그 용기 때문이다.

위암이 재발하여 대장으로 다 퍼졌을 때도 병상에서 직장 동료들의 수고를 안타까워하던 그 사랑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보내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했다. 우리는 너무 착하게 살지 말자고. 그는 만신창이가 된 자신의 몸조차 장기는 기증하고 나머지 몸은 수목장(樹木葬)으로 이 땅에 돌려주었다.


마흔넷, 18년의 공직생활…. 그는 지난 5월1일, 우리 곁을 떠났다. 무척이나 사랑하는 아내와 세 자녀를 남기고. 그토록 그를 아쉬워하는 동료들을 뒤로하고….

이글은 고인과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던 문화관광부 김찬 관광국장과 노일식 국제관광과장이 보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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