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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5 17:54 수정 : 2006.06.25 17:54

초등·대학서 선수생활…기사 고정틀 깨고 ‘땅표’ 첫 마련
투병중에도 후배 걱정…지금도 하늘서 녹색구장 살피겠지

[가신이의 발자취] 28년 외길 야구기자 이종남씨

이종남 선배께.

28년 야구기자 외길을 걸으며 한국야구에 큰 발자취를 남기신 선배께 야구기자 갓 2년차인 ‘햇병아리’가 감히 ‘선배’라고 불러봅니다.

선배 별세 소식을 접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습니다. 생전 얼굴 한번 뵙지 못했지만, 제가 이 글을 자청한 것은, 저의 가슴 속엔 오래 전부터 ‘야구기자 이종남’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진으로 본, 까만 뿔테안경이 잘 어울리는 사람좋은 미소가 떠올랐습니다. 우리 나이로 쉰넷. 하늘이 무심하기만 합니다. 제가 ‘야구기자 이종남’을 처음 접한 것은 아마도 80년대 중반 무렵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일성 한국야구위원회 사무총장님의 책 제목처럼 “나는 밥보다 야구가 좋다”고 떠들고 다니던 시절, 선배의 맛깔스런 기사는 저같은 야구팬들의 목마른 갈증을 시원하게 채워주곤 했습니다. 당시 선배의 기사는 승패 위주의 고답적인 틀을 처음으로 깬 것으로 기억합니다. 선배는 또 박스스코어보다 훨씬 자세한 ‘땅표’를 처음으로 만드셨죠. 땅표만 들여다 봐도 마치 경기를 직접 본 것처럼 훤했습니다.

저희 집 책꽂이에는 선배 책 몇권이 꽂혀 있습니다. <야구가 있어 좋은 날> <추억의 다이아몬드> <심판도 할 말은 있다> 같은 책들을 단숨에 읽어내려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레너드 코페트 책을 번역한 <야구란 무엇인가>는 제게 ‘야구도 학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선배가 집필하신 무려 20권 넘는 책들은 ‘야구의 교과서’입니다. 선배는 최초의 야구기자 채드윅에 견줄만한 ‘한국의 채드윅’이었습니다.

선배는 2002년 8월, 파업으로 뒤숭숭했던 <스포츠서울>에서 사상 첫 임명동의제를 통해 편집국 사령탑을 맡았습니다. 능력과 신망을 겸비했기에 후배들이 중책을 맡겼던 것이지요. 야구계에서는 “이종남과 술 한잔 못한 야구인은 바보거나 간첩”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만큼 야구인들이 선배를 아끼고 사랑했다고 생각합니다.

한겨레신문사에도 선배의 지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미 넘치면서 엄청나게 노력하는 기자”라는 게 한결같은 평입니다. 작년 봄, 스포츠부 후배가 선배를 인터뷰했을 때, 선배는 “한 시절 야구기자로 나만 잘 살았던 것같다”면서 자신의 건강보다 경영위기에 몰린 스포츠신문 후배들을 더 걱정하셨다죠? 암덩어리와 싸우면서도 인터뷰 내내 미소를 잃지 않으셨다죠? 폐암 말기 진단을 받고도 <종횡무진 인천야구>를 펴내셨고, 내친김에 <부산야구> <광주야구>까지, 그리고 어린이를 위한 야구서적까지 준비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쩌면 선배는 야구를 위해 태어났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 야구 본고장 인천 출신으로, 야구가 이땅에 들어온지 100년이 되는 해에 마지막 작품을 남겼습니다. 인천 축현초등학교와 서울대 야구부에서 선수로 뛴 것을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겼다고 들었습니다.

지난해 말, 건강이 좀 회복됐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한국야구발전연구원 초대 원장을 맡으셔 왕성한 활동도 기대했습니다. 선배는 투병 중에도 문병 온 후배들에게 “취미를 직업 삼아 한평생 잘 써먹었으니 됐다. ‘Yes, call it a life!’(내 인생 이것으로 됐다!)”고 했습니다. 그 말이 자꾸 제 가슴을 더욱 저미게 합니다. 후배들이 선배를 지켜드리지 못해 송구할 뿐입니다. 한편으론 많은 것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지금도 사람 좋은 미소 머금고 하늘에서 녹색 다이아몬드를 내려다 보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자주자주 하늘을, 선배를 올려다 보겠습니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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