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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7.09 22:36 수정 : 2006.07.09 22:38

2000년 9월 조남철 9단과 이창호 7단의 대국 장면. 이정용 기자 lee312@hani.co.kr

[가신이의 발자취] 프로바둑계 대부 조남철 선생

프로기사제 포석 깔고 용어 정립·후진 양성 헌신
땀·희생 한수 한수 복기핟스 되새기며 살렵니다

조남철 선생님.

환후가 깊고 오래되어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막상 선생님 부음을 듣고는 가슴 한 구석이 납덩이를 얹은 것처럼 메어져 왔습니다. 오늘날 저희들이 누리고 있는 세계 바둑 최강이라는 과분한 영광의 뒤편에는 우리 바둑계의 여명기를 밝혔던 선생님의 헌신과 희생어린 땀이 흥건히 배어 있음을 감히 부인할 사람은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육순을 넘긴 원로에서부터 이제 갓 프로에 입단한 십대 수졸(守拙)들에 이르기까지 이땅의 프로기사라면 누구라도 결코 선생님의 그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것입니다.

1950년 6월, 북쪽에서 들려오는 포성을 배경으로 낙원동 대한기원에서 벌어졌던 첫 단위결정시합에서 선생님은 3단이 되시고 열세 명의 초단이 탄생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 프로기사 제도의 첫 출범이 되었으니까요.

6·25 전쟁에 참전하셔서 인민군 총탄을 맞으셨던 선생님께서는 이후의 삶은 여섯집 반의 덤과 같은 것이라며 우리나라 바둑계 발전을 위해 더욱 몸을 아끼지 않으셨지요.

아마추어 바둑팬들이 바둑이 느는 비결을 가르쳐 달라 물으면 “그런 방법이 있으면 내게 좀 가르쳐 주시오”하고 둘러대시던 선생님이셨지만 프로기사 후배들에게는 “자나 깨나 바둑에 미쳐라”라고 엄히 강조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바둑공부를 꼭 바둑판 앞에서만 하란 법이 있나? 일본 유학 시절, 길 가면서, 심부름 하면서, 목욕탕 불을 지피며, 하다못해 화장실에서 볼 일 볼 때조차 바둑만을 생각했지. 그렇게 6개월을 하고 나니 바둑판이 훤히 보이기 시작하더군. 그리고 입단을 했지.”

선생님께서는 1955년 바둑 출판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이자 명저인 <위기개론>(圍棋槪論)을 출간해 우리 바둑계에 일본식이 아닌 한국식 바둑용어를 정립시키고자 애쓰셨지요. 말이란 것이 한번 정해지고 나면 바꾸기가 어렵다보니 ‘아다리’에서 ‘단수’로 바뀌기까지 수십년이 걸렸다며 웃으시던 선생님 모습이 선합니다. 선생님께서는 위기개론 외에도 <행마의 급소> <정석정해> <실전사활> 등 일본 해적물이 판치던 우리나라 바둑 출판계에 주옥같은 저서를 아낌없이 풀어 놓으셨지요. 아마도 우리 세대의 프로기사, 아니 바둑을 두었다는 사람치고 선생님 저작의 수혜를 입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선생님의 열렬한 독자이자 제자였던 셈이지요.

선생님께서는 1945년 해방되던 해 남산동에 한성기원의 간판을 내거시며 세가지 목표를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장차 국제대회가 생길 것에 대비해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으로 대체할 것, 둘째 내기바둑을 금하고 건전한 국민오락으로 보급할 것, 마지막 포부는 한성기원을 장차 일본기원 못지않게 훌륭히 발전시키는 것이었지요.


반세기가 흘러 한국바둑은 세계대회를 십년 이상 제패하며 정상에 올랐습니다. 또한 바둑은 건전한 두뇌 스포츠로 인정받아 대한바둑협회가 대한체육회 준가맹 경기단체가 되는 등 스포츠바둑의 열기가 날로 뜨거워지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세우신 한국기원은 이제 일본,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국내뿐만 아니라 세계바둑 보급을 위해서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비록 선생님께서는 가셨지만 젊은 시절 품었던 세 가지 원대한 꿈이 하나하나 이루어지는 모습을 보고 가셨다고 생각하니 저희들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 합니다.

선생님이 계셨기에 이땅의 바둑인들은 진심으로 행복했습니다.

한 판의 명국과도 같았던 선생님의 83년 삶. 한 수 한 수 복기하듯 되새기며 살아가겠습니다. 편히 영면하십시오, 선생님.

양상국 프로8단/한국기원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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