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박동서 전 서울대 교수
존경하는 선생님, 선생님이 우리 곁을 떠나신 지 오늘로 꼭 한달이 되었습니다. 어제 7월24일은 선생님께서 이땅에 오신 지 만 77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 빈자리가 자꾸만 더 크게 느껴집니다. 선생님, 한국행정학 1세대로 우리나라에 현대행정학을 도입·발전시킨 그 발자취는 한국행정학의 역사 그 자체이자 건국 이후 한국 사회 발전과정과 궤적을 같이합니다. 1959년 우리나라 최초의 행정대학원인 ‘서울대 행정대학원’ 창설 요원으로 학계에 발을 내디딘 선생님께서는 1960년대 ‘발전행정학’을 도입해 한강의 기적을 일군 개발연대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하였는가 하면, 1980년대 이후에는 정치·행정의 민주화를 한국 사회의 가장 시급한 국가적 과제로 제시하셨습니다. 학문적으로는 일생 동안 행정이론의 한국화·토착화에 열정을 바치셨습니다. 서울대 행정대학원 창설 멤버로 활동행정이론 토착화 위해 한평생 바쳐 구한말 개화파로 초대 주미공사를 거쳐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한 박정양 선생 손자이신 선생님께서는 경기중학을 거쳐 서울법대를 졸업한 뒤, 1957년부터 미국의 대외 원조기관인 국제협조처(ICA) 프로그램에 따라 미네소타대에 유학하셨습니다. 그 후 서울대 교수로 부임한 선생님께서는 서울대 행정대학원장, 한국행정학회 회장, 한국정치학회 회장, 학술원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우리나라 국가행정 발전과 행정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하셨습니다. 교수생활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근대적 행정학을 도입·확산시키는 데 선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신 선생님께서는 1960년대 이후 정부 관료제를 국가의 근대화, 산업화를 이끄는 중심장치로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이셨습니다. 1972년 펴낸 〈한국행정론〉 서문에서 선생님은 “현재 우리나라 행정의 주요 목표는 발전행정 능력의 향상에 있으므로” 라고 명시하신 바 있습니다. 행정학 1세대로 서구이론 도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서는 학문활동 초기부터 서구사상 및 외국학자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때 따르는 문제점을 인식, 행정학의 한국화에 학문적 열정을 불살랐습니다. 책이름을 〈한국행정론〉으로 지은 것도 “한국에 중점을 두고자 했기 때문”이라고 밝힌 선생님께서는 각 절의 말미에 ‘한국의 경우’라는 별도의 항을 두어 서구이론의 한국적 적실성(適實性)을 심도있게 논하였습니다. 이러한 책 구성은, 외국이론의 단순한 번역·소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던 당시 상황에서 한국 행정학계에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행정학 토착화에 대한 선생님의 사명의식은 1998년부터 한국행정학회 연례 학술세미나에 ‘한국행정논단’이라는 패널을 설치하게 하고 그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해 오신 데서 절절히 느낄 수 있습니다. 행정쇄신위원회 위원장으로 실무행정의 개혁작업을 추진한 선생님께서는 또한 우리 사회의 민주화가 궁극적으로 행정의 민주화로부터 비롯돼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국가정보원·검찰·국세청·금융감독위원회·공정거래위원회·방송위원회 등과 같은 권력기구를 중립화해 국민의 신뢰를 얻는 데 개혁의 초점을 모아야 한다”고 주창하셨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주례선생님이기도 하신 선생님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지만 학맥을 따져 편가르기 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셨습니다. 평소에도 거동이 좀 불편하셨던 선생님께서 일흔이 넘어 다친 심한 골절상을 극복하고 다시 학회 세미나에 모습을 나타냈을 때 학회원 모두가 그 불굴의 의지에 놀랐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죽기를 각오하고 집안에서 수개월간 걷기 연습을 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이 땅의 행정학도 모두가 그 학문적 열정과 자세를 닮고 싶어 한 큰 스승이셨습니다. 오늘날 어지럽게 흐트러진 우리 사회의 현실을 보면서 선생님의 빈 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집니다. 하늘나라에서 안식하시길 두손 모아 빕니다. 2006년 7월 25일 제자 이종수(한성대 교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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