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신이의 발자취] 파주시 통일촌 농장 김정옥씨
육신 벗은 지금 여행 다니시느라 더 바쁜건 아니세요?온가족이 일군 작물로 식탁 차리면 너무 뿌듯 아버지, 저 왔어요. 잠 들어 계신 이곳 통일동산에서 오늘도 해넘이를 보고 가려고 들렀어요. 옆에 벌써 새 이웃이 여섯 분이나 생겼네요. 두런두런 이야기 나눌 친구도 사귀셨는지 모르겠어요. 가신 지 어느덧 두달이 지났습니다. 너무 빨리 가신 아버지 생각할 때마다 아쉬움과 그리움이 사무쳐 옵니다. 아버지가 삼십년 동안 일궈 놓으신 통일촌 농장에서 여름 내내 어머니와 논밭 김매기, 논물 대기, 고추 하우스에 물 주고 붉어진 고추 따서 말리기 같은 일 하면서, 아버지가 어떻게 사셨던가 이야기할 적이 많습니다. 생전 어머니께조차도 꼭 할 말만 하셨을 만큼 다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점이 가장 큰 불만이셨다던 어머니가 전해주신 아버지 일생은 ‘근면 정직 성실’ 그 자체였기에 가난했지만 언제나, 누구한테나 당당하셨다는 것이었습니다. 워낙 저희 자식들한테도 말씀이 적으셨던지라 곁에 있으면서도 잘 깨닫지는 못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종종 원칙주의를 고집하다 난감해지면서도 끝까지 당당하기 위해 적당주의를 뿌리치고 사는 제 성향도 사실은 아버지한테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싶군요. 이 땅의 농군으로 삼십년을 사시면서 운명 두어 달 전쯤, 늘어만 가는 빚 때문에 목숨을 떼어내고 싶은 심정이 들었던 때도 있었다고, 자식들에게 누가 될까 차마 그러진 못하셨다고 털어놓으셨을 때 얼마나 제 가슴이 저리던지요. 제 앞가림하고 살기 바빠하는 저희 삼남매에게 재산은커녕 빚을 물려주어서는 안되겠다는 일념으로 갖은 애를 쓰신 끝에 비로소 1년 전, 빚을 청산하고 이제 “휴우!” 하시며 부부만의 몫을 찾으실 수 있는 때가 되자마자 이처럼 황망히 가시니 어머니 가슴이 더 찢어지시나 봅니다. 칠십 넘은 연세에 근방 젊은이들도 엄두 내지 못한 친환경 농법을 공부하기 위해 작년 초 위 절제수술 뒤 까다로운 식사를 해야 하는 불편함도 아랑곳 않고 젊은이 같은 포부를 가지고 최연장자로 과정을 마치신 아버지. 젊고 강한 정신력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그 일을 하실 수 있었을까요? 호기심도 많아 농사 일에서 놓여날 수 있었던 겨울 한 철이면 어머니랑 우리나라 이곳저곳 둘러보기를 즐기셨던 아버지, 육신의 한계를 벗은 지금 생전에 못 가보셨던 곳 보러 다니시느라 더 바쁘신 건 아닌지요? 돌아가실 줄 모르고 시작한 올 농사는 아버지 장사를 치르고나자 그야말로 논밭 모두 호랑이가 새끼칠 정도로 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만, “아버지가 계셨을 땐 이러지 않았다, 어딘가에서 혹시 이 꼴을 내려다보신다면 얼마나 걱정하시겠느냐”며 70대 노구를 바삐 움직이며 슬픔도 잊으시려던 어머니와 아래 웃논 이웃 분들 덕에 이제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올케, 오빠, 조카들 뿐아니라 사돈들까지 합세해 모두 제 사정에 맞춰 농장 일을 거들었더니 이젠 제법 우렁이가 뒹구는 논에서 나날이 영글어가는 벼포기를 볼 수 있게 되었어요. 아버지 빈 자리를 메우기가 아직은 힘들지만, 그 맥을 여기서 끊을 수는 없다는데 남은 식구들 마음이 모아졌습니다. 모여서 일 마치고 나올 땐 늘 그날 딴 토마토 오이 가지 수박 참외 고추 들을 한 바구니씩 나눠가 참살이 식탁을 차리는 일이 즐겁다고 모두들 뿌듯해 한답니다. 갈수록 편한 것, 쉬운 것, 눈앞 이익만 찾는 요즘 사람들 행태에 휩쓸리지 않도록, 근면 정직 성실에 바탕해 언제나 당당하셨던 아버지 삶을 가슴에 새기고 살겠습니다. 꼭 할 말만 하시면서 평생 사람살이의 기본 미덕을 솔선수범하셨던 아버지께 저 역시 쑥스러워 못했던 이야기를 이제야 하렵니다. “아버지 사랑해요!” 이 글은 지난 6월30일 72세를 일기로 별세한 김정옥씨를 그리며 딸 소현(43)씨가 보내왔습니다. 고인은 충북 보은 속리산 기슭에서 태어나 경기도 파주시 군내면 통일촌에서 30여년 농사를 지은 참농사꾼이었다고 합니다. 고인은 2004년 12월 위암이 처음 발견돼 수술을 통해 치료됐으나, 올 초 재발돼 5개월여 투병 끝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부인 김순해(72)씨와 사이에 소현씨 등 2남1녀, 여섯 손자녀를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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