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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08 19:27 수정 : 2006.09.08 19:27

[가신이의발자취] 부산 청년운동 이끌던 고 박장홍씨

저렇게 맑은 미소가 있을까? 커다란 플래카드에 새겨진 얼굴이 빼곡이 앉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웃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울고 있습니다. 휑하니 넓은 듯 했던 분향소에 참다 참다 터져 나온 울음이 흘러 넘쳐 선배께서 그토록 사랑했던 조국 산천으로 흘러갑니다.

선배는 개인사가 곧 청년운동 역사가 되게 한, 청춘을 깡그리 ‘청년조직’ 건설과 확대에 다 바친 지도자입니다.

스물여섯 나이에 부산민주청년회(부민청) 활동을 시작으로 청년운동을 시작해 15년간 벌인 정력적 활동은 부산 뿐만 아니라 남한과 해외의 많은 조직·연대체, 그리고 수많은 사람을 남기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결과 부산민족민주청년회(부산민청) 결성과 강화, 한국청년단체협의회(한청), 6.15공동선언 실현을 위한 부산지역 청년학생연대 결성, 재일한청과의 연대 실현이라는 성과를 낳았습니다. 그것은 곧 청년들이 조국을 위해 단결된 힘으로 제 역할을 다하도록 힘쓰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정권이 바뀌고, 정세가 변할 때, 간혹 운동의 성과를 개인의 성과로 돌리고 개인의 지위와 명예를 위해 이리 기웃 저리 기웃 하는 사람을 보거나 신념을 꺾고 포기하는 사람을 보곤 합니다. 그러나 박장홍 선배는 개인적 명예, 부와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선배는 신념이 강해 후배들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름과 시간과 돈 모두 조국의 자주·민주·통일을 위해 다쓴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이름으로 된 통장 하나 제대로 없고, 사랑하는 아내와 여행 한번 가지 못했으며, 쓰러지기 전에도 서울에서 방 구할 돈을 북녘땅 수재민 돕기모금에 냈으면 한다고 얘기했다 합니다.

선배는 잠자리조차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습니다. 6·15공동선언 발표후 한청 부의장으로, 조국통일위원장 역할까지 수행하며 전국으로, 일본으로 자신이 필요한 곳에 쉬지 않고 달려갔습니다. 깡마른 몸으로 바쁜 하루를 다 보내고도 달콤한 휴식을 꿈꿀 시간, 회원들과 동지들이 있는 곳을 찾아 기쁜 일에는 더 기뻐하고, 가슴 아픈 일이 있으면 더 아파하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끼니 거르는 회원이 있으면 넉넉하지 않은 주머니를 털어 챙겨주고, 생활과 활동에 어려움 있는 회원 이야기를 들으면 수첩에 적어놓고 당사자보다 더 많이 고민하며 이야기를 나누곤 했습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를 선물하며 회원들에게 사랑과 믿음을 전하기도 했습니다.

‘6·15시대’에는 컴퓨터도 잘 다루어야 한다며 각종 사이트에 카페, 홈피 등을 만들어 사람들, 정세, 유행하는 것들, 문학예술과 관련한 것들을 담아내고, 만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인터넷을 통해 마음을 주고받았습니다.


당신은 자신의 모든 시간과 마음을 청년운동 후배들에게 내주며 살았습니다.

이제 선배의 신념이 당신과 함께 한 이들의 신념이 되고, 그 헌신성에 감동한 사람들이 선배를 삶의 푯대로 삼고자 다짐하고 있습니다. 너도나도 박장홍이 되자고 합니다.

삼가 옷깃을 다시 여미며 선배를 이제 보내드립니다.

이글은 지난달 31일 숨진 박장홍(40) 전 부산민족민주청년회 의장을 기리며 후배 김은경(34·여) 독자께서 보내오셨습니다. 고인은 8월12일 저녁 부산 연산동에서 길 가다 갑자기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왔으나 끝내 회복하지 못하고, 양산시 솥발산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잠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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