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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15 21:15 수정 : 2006.09.15 21:15

지난 4월14일 경북 영천시 청통면 면사무소 앞에서 열린 ‘영농 발대식’에서 고 이주영씨가 꽹과리를 치며 분위기를 돋우고 있다. 사진 전농 경북도연맹 제공

[가신이의발자취] 귀농 농민운동가 고 이주영씨

형, 생각도 하기 싫은 9월6일. 그날 하루는 너무도 길었습니다. 형을 아는 모든 이들이 정신을 잃은 모습이었습니다. 아직도 ‘거짓말 같은 얘기’로 들립니다. 진짜 거짓말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형이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났는지 자꾸자꾸 되묻곤 합니다.

사고 하루 전날, 전화를 해도 형은 받지 않았습니다. 안부 전화라도 해야겠다며 버튼은 눌렀는데 아무런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하늘이 무너지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게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습니다. 형과 함께한 인연도 2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이제 형을 보내야 하는데…. 눈앞이 캄캄하기만 합니다.

80~90년대 “좋은 세상 만들자” 학생운동
14년 전 농민으로 살겠다며 영천 청통서 정착
“농민 되기 왜 이리 힘드냐” 울던 착한 사람

형은 항상 고향을 자랑했습니다. 아버지는 탄광 노동자로 일생을 보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형은 이땅 농민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던 것 같습니다. 진짜 농민이 다 되었는데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입니까.

대학 시절, 참으로 많은 후배들이 형을 따랐습니다. 형의 넓디넓은 마음과 진정으로 사람을 대하는 자세는 많은 후배들과 인연을 만들었습니다. 저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형 기억납니까. 80, 90년대 온몸으로 세상과 부대끼며 좋은 세상 만들겠노라고 다짐하고 또 치열하게 살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지금까지 달려왔습니다.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형만 이제 우리 곁에 없습니다.

형이 영천 청통으로 농사지으러 간 지 5년쯤 되는 해였습니다. 형의 집은 조금은 초라하지만 아담했습니다. 왜 영천이냐고 했더니 형은 농담처럼 답했습니다. “친구따라 영천에 놀러 갔다가 사과꽃이 너무 예뻐서….” 하지만 그날 밤 형은 처음으로 후배 앞에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농민이 되는 게 왜 이렇게 힘드냐”고. 저도 같이 울었습니다. 그날 진짜 농사꾼 모습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형의 땅은 단 한 평도 없었습니다. 연고도 없는 영천 땅에 뿌리내리기 위해 흘린 눈물이 그때가 처음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어느 해는 1년 내내 허리 부러지도록 일해 겨우 500만원을 벌었지요. 그런데도 형은 단 한번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지요.

대구·경북 지역에 형의 정성과 숨결이 닿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농민들을 만나러 다니는 형의 모습은 가끔 너무나 피곤해 보였습니다. 지난해부터 형은 진짜 농민이 되었다며 기뻐했습니다. 힘든 것도 잊고 형은 새록새록 솟아나는 꽃망울처럼 매번 농사일이 재미있다고 했습니다. 청통 복숭아 작목반 총무, 영천시 친환경단체협의회 부회장, 영천시 농민회 친환경작목반장으로 활동하면서 형은 너무 좋아했습니다.

형, 너무나 짧은 40년 당신의 생은 하고 싶은 말 못하고 살아온 세월이었을 겁니다. 그 많은 얘기, 이제 후배들 몫으로 남겨주십시오. 형수와 아이들을 생각하면 눈을 감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지만 형이 남긴 수많은 선·후배들이 있습니다. 형, 걱정 마시고 이제 부디 편히 쉬십시오.


*이 글은 9월6일 불의의 교통사고를 당해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뜬 이주영씨를 그리며 후배 이영재(39·대구북구시민연대 대표)씨가 보내왔습니다. 고인은 대학(경북대 금속공학과 85학번) 때 학생운동으로 투옥되기도 했으며, 1993년부터 경북 영천에서 농사를 지으며 농민운동에 헌신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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