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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10.15 19:49 수정 : 2006.10.15 19:49

연합뉴스

[가신이의발자취] 인권운동 대부 홍남순 변호사

나라에 큰 별이 졌습니다. 한 시대를 이끌던 국가 원로 어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온 나라가, 온 국민이 슬퍼하는데 가까이 모시고 지내던 저의 마음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잠기게 됩니다.

취영(翠英) 홍남순 선생은 애초에는 이 나라의 기득권층에 속했습니다. 해방 뒤 변호사시험에 합격해 판사가 되었고, 강경지원장과 광주고등법원 판사를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선생은 오래지 않아 60년대 초 법복을 벗고 변호사로 활동했습니다. 변호사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업인데, 선생은 기득권층으로서 모든 지위와 권능을 접고, 힘들고 버거운 인권변호사 길을 택했습니다. 1964년 군사독재정부가 한일회담을 무리하게, 그리고 굴욕적으로 처리해 가자, 대학가에서는 반대시위가 벌어지면서 양심과 정치적 이유로 감옥에 갇히는 민주인사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분개한 선생은 그런 의로운 인사들의 법률구조를 위해서 ‘무료변론’으로 인권옹호에 매진했습니다.

60년대 이후 양심범 속출하자 인권옹호 매진
5·18땐 옥고도…독재사슬 끊기 ‘위대한 희생’

1975년 장준하(앉은 이) 선생과 함께한 홍남순(왼쪽) 변호사.

세월이 가면 좋아지리라는 나라의 정치는 바른 길을 가지 못하고 독재권력만 강화하면서 양심적인 정치범들이 속출하는 세상으로 변하자 선생은 방방곡곡 법원을 찾아 변론에 나섰습니다. 명성이 비록 높았으나 경제적으로는 쪼들렸고 심신이 고달프기 짝이 없는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1970년대 유신체제 독재가 진행되자, 선생은 민주화운동에 직접 가담하게 됩니다. 국제사면위원회, 곧 앰네스티운동에 앞장서며 민주회복국민회의의 지도자로 몸소 민주화운동 한복판에 자리했습니다. 회갑을 넘어 고희에 가까운 고령이었으나, 젊은이 이상의 용기와 지혜를 지닌 채 앞줄에 서서 후배들을 이끌었습니다.

극에 달하던 독재는 마침내 광주 5·18 민중혁명을 촉발시켜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고 인권을 짓밟고 권력탈취에 혈안이 됐습니다. 신군부 만행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낀 선생은 이에 맞서다 끝내 영어의 몸이 돼 무기징역이라는 중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국가를 변란할 목적으로 폭동을 일으킨 중요 임무 종사자라는 죄명이었으니 얼마나 기막힌 일인가요. 암흑의 군사독재의 사슬을 끊기 위해 일하신 선생의 위대한 희생은 이제 국가와 국민으로부터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거늘, 선생은 영원히 눈을 감고 마셨습니다.

우리 젊은이들이 쫓기고 몰릴 때, 선생은 뭇병아리들의 어미닭 구실을 해주셨습니다. 비가 오거나 추우면 병아리들이 어미닭 품으로 들어가듯, 젊은이들은 선생 품에 안기면서 당국의 탄압에 맞서 싸울 수 있었습니다. 민주의 성지 광주의 어른이자 나라의 원로이신 취영 선생님. 이만한 큰 어른을 언제 어디서 다시 뵈올 수 있을지, 슬프고 가슴이 막힙니다.

오랜 투병중에도 자주 찾아뵙지도 못하다 부음을 접하고 보니 가슴이 더욱 아픕니다. 이제 이 나라는 많은 부문에서 민주화가 이룩되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맡기시고 이제 편히 저 세상에서 쉬십시오. 영생을 누리면서 민족과 국가가 더 잘 되도록 빌어주시기 비옵니다. 오호통재로다. 2006년 10월15일

박석무(다산연구소 이사장)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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