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10.15 22:12
수정 : 2006.10.16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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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광주 동구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마당에 마련된 고 홍남순 변호사의 분향소를 찾은 추모객들이 헌화한 뒤 추도하고 있다.
광주/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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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헌법 반대 등 60여 시국사건 무료 변론
시민 등 애도 행렬 밤늦게까지 헌화·분향
인권운동 큰 어른 홍남순 변호사 별세
14일 영면한 홍남순(93) 변호사는 1970~80년대 군부독재에 맞서 민주화와 인권운동의 깃발을 높이 들었던 ‘광주의 의인’이자 ‘5·18의 증인’으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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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남순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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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913년 전남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벽촌에서 태어나 능주보통학교를 졸업했다. 37년 일본 아카마야상공학교를 졸업한 뒤 돌아와 48년 2회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해 한국전쟁 뒤 광주지법·광주고법·대전지법 등의 판사로 평탄한 법관생활을 했다.
그의 인생이 뒤바뀐 것은 5·16 쿠데타 뒤 정치상황에 염증을 느껴 63년 사직하고 광주시 동구 궁동 자택에 호남합동법률사무소라는 이름으로 변호사 사무실을 열면서부터. 그의 사무실은 지인들이 찾아들면서 ‘광주지역의 민주주의 사랑방’으로 불렸고, 점차 숱한 시민·학생·문인이 시국을 토론하고 민족을 걱정하는 마당이 됐다.
그는 60~70년대 한-일 회담 반대, 3선 개헌 반대, 유신헌법 개정 등 반독재 투쟁에 몸을 던졌다. 더불어 3·1 구국선언, 양성우 시인 필화, 전남대 교육지표 선언 등 60여건의 시국사건에 얽힌 양심수들을 무료로 변론했다. “어둠의 시대에는 법보다는 양심이 앞선다”는 것이 그의 한결같은 소신이었다.
80년 5·18 민주화운동 때는 5월26일 수습위원 16명과 함께 계엄군의 전남도청 진압작전을 저지하려는 ‘죽음의 행진’에 나섰다가 내란수괴 혐의로 체포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년7개월 옥고를 치렀다.
이후 5·18구속자협의회장과 5·18위령탑건립추진위원장 등을 맡아 5·18 명예회복에 앞장섰지만 국가보상이 이뤄지자 “죽은 사람들한테 부끄럽다”며 4차례 보상신청을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는 2001년 11월 뇌출혈로 쓰러진 뒤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전남대병원과 광주인광병원을 오가며 5년간 투병했고 가족과 친지의 신청에 따라 뒤늦게 5·18 유공자가 됐다.
홍씨는 가톨릭 인권상(85년), 대한변호사회 인권상(86년), 국민훈장 무화장(93년) 등을 받았다.
광주지역 재야인사들은 이런 고결한 인품과 민주화의 행로를 정리한 평전 <영원한 재야 대인 홍남순>을 출판하기도 했다.
부인 윤이정씨는 92년 세상을 떠났고, 자녀는 13·14대 국회의원을 지낸 홍기훈(53)씨 등 5남2녀를 두었다.
옛 전남도청 분향소에는 14~15일 노무현 대통령, 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 등 각계 인사 100여명이 조화를 보내왔고, 시민·학생 등 추모 발길이 이어졌다. 김근태·박근혜·손학규·한화갑씨 등 정치인, 천주교 광주대교구 윤공희·최창무 대주교, 송기숙 전 전남대 교수, <한겨레> 정태기 사장 등이 분향소를 찾아 고인의 넋을 기리고 유족을 위로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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