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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6.27 18:52 수정 : 2007.06.27 23:51

‘80년 5월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씨

‘80년 5월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씨 타계

‘5월의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민족미래연구소장이 27일 오후 1시32분 타계했다. 60살.

윤 소장은 지난 25일 서울에서 폐 이식수술을 받은 뒤 경과가 좋았으나, 이날 새벽 병세가 급격히 악화돼 결국 운명했다. 고인은 고문과 투옥, 밀항 등으로 건강이 나빠졌고, 1994년 폐기종이 생겨 수년째 투병 생활을 해왔다.

전남 강진 출신인 윤 소장은 민주화 운동의 외길을 걸어왔다. 전남대 농대 재학 시절인 74년 이른바 ‘민청학련 조작 사건’으로 징역 15년을 선고받고 1년 만에 석방된 뒤 광주지역 청년운동의 중심 구실을 해왔다. 그는 79년 10월 긴급조치 위반으로 붙잡혀 석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했다. 5·18 민중항쟁 직후에는 배후 주동자로 전국에 수배돼 11개월 동안 도피하다가 81년 4월 3만5천t급 무역선을 타고 한평반짜리 화장실에 35일 동안 숨어서 미국으로 밀항했다.

그는 미국에서 민족학교를 세웠고, 미국·일본과 유럽에 ‘한청련’을 결성해 국외에서 민주화 운동을 펼쳤다. 망명 기간에 ‘살아남은 자의 부채 의식’ 때문에 미국 생활에 의도적으로 적응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킨 것도 고인의 일면을 보여주는 일화다. 윤 소장은 93년 수배가 풀리자 귀국한 뒤, 광주로 돌아와 5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인사와 단체들을 거침없이 비판해 ‘광주의 쓴소리’로 불렸다.

그는 94년 5·18기념재단 설립을 주도하고도 어떤 직책도 맡지 않았다. 다만, ‘노동자의 누이’ 고 박기순씨와 5·18 민중항쟁 때 영면한 윤상원·박용준씨 등 ‘들불 열사’ 7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들불열사기념사업회’를 설립해 이사장을 맡아 5·18 상무공원에 추모 조형물을 세웠다.

윤 소장은 지난달 들불열사기념사업회 시상식 때 지인들에게 “폐가 10%밖에 기능을 못해 몇 걸음만 걸어도 숨이 가쁘다”며 “바깥출입을 못하는데 ‘들불’ 때문에 어렵게 왔다”고 말했다.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고인의 옆 감옥에 갇혔던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이날 저녁 9시께 빈소에 도착해 “한국 민주화 운동의 거목이 스러져 가슴이 아프고 애석하다”고 말했다.

윤 소장의 유족으로는 부인 신경희(46)씨가 있다. 장례는 시민·사회단체 인사들을 중심으로 장례위원회를 구성해 30일 오전 민주사회장(4일장)으로 치러진다. 빈소는 조선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됐으며, 장지는 국립 5·18민주묘지다. (062)231-8901. 광주/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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