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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8.02.10 20:13 수정 : 2008.02.10 20:13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실에서 집무를 보고있는 고 조문기선생.

조문기 선생 영전에 바칩니다

일제강점기 ‘마지막 항일의거’로 불리는 부민관 폭파사건의 주역 조문기 선생이 지난 5일 82살을 일기로 우리 곁을 뜨셨습니다. 그동안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을 맡아 친일인명사전 편찬을 지도해 오신 선생님께서 사전 발간 6개월을 남겨두고 홀연히 타계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굴곡진 현대사를 살아오시면서 한눈팔지 않고 정도를 당당히 걸으신 우리 시대의 귀한 스승이십니다. 개인적으로는 강퍅한 삶이었지만 겨레에게는 소중한 자산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일본으로 건너가신 후 1944년 조선인노동자 3000여 명을 규합해 대규모 쟁의를 일으키고 국내로 돌아와 애국청년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벌였습니다. 해방을 앞둔 1945년 7월 24일 친일파 거두 박춘금 일당이 필승체제 확립과 내선일체의 촉진을 목표로 대의당을 결성, ‘아시아민족분격대회’ 라는 것을 서울 부민관에서 열 때 유만수·강윤국 지사와 함께 다이너마이트를 장치한 폭탄을 터뜨려 항일의거의 마지막 장을 장식하셨습니다. 해방 뒤에는 통일정부 수립운동에 참여하고 ‘황금좌’ ‘고려’ 등 극단 활동을 하셨으며, 이승만 대통령 암살음모 조작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는 등 시련을 겪었습니다.

선생님은 자신의 독립운동과 관련, “부민관사건은 독립운동사에서 작은 점 하나에 불과 할 뿐” 이라며 겸양을 보이면서 “친일파 청산이 이뤄지지 않고 오히려 그들 및 후손의 득세가 이어지는 한 광복은 허상 일뿐” 이라는 생각에서 한번도 3·1 절이나 광복절기념식에 참석하지 않는 결기를 보이셨습니다.

선생님의 원칙주의와 나라사랑 정신은 차라리 종교의 엄숙주의에 가깝고, 민족의 독립자주에 대한 인식은 경건한 신앙인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영리는 한낱 티끌 같은 것이었고, 대의·청절에 굽힐 줄을 몰랐습니다. 학자가 아니고 문인이 아니면서도 생각이나 행동은 군자와 지사와 선비를 합치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선생님의 마르지 않는 민족의 얼과 혼은 노령에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의 책임자로 추대되고, 청고한 뜻과 청빈한 생활은 속내 깊은 젊은이들의 스승으로 받들어졌습니다. 젊어서는 의롭게, 중년에는 정직하게, 노년에는 깨끗하게 살아오신 선생님의 생애는 그래서 기회주의와 속물주의가 판치는 세태에서 바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의 사표이셨습니다.


“옳게 또 떳떳하게 행동하는 사람은 오직 그러한 사실만으로써 능히 불행을 견디어나갈 수 있다는 점을 나는 입증하고 싶다” 라는 베토벤의 말이 아니라도, 선생님께서는 ‘바른 삶’으로 힘들었던 시대의 불행을 이기셨습니다.

지난 고난의 시대에 개인적인 삶을 민족적인 운명과 분리시키지 않은 사람치고 평탄한 생애를 보낸 사람은 없었습니다. 선생님도 그러셨습니다.

선생님, 입춘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아직 춥습니다. 언 땅을 파고 선생님을 묻어야 하는 후생들의 몸도 마음도 떨릴 것입니다. 그것보다 ‘민족’ 이라는 용어까지 천더기 신세가 되어가는 세태가 더 가슴 아프고 추울 것입니다.

선생님, 영면하십시오. 육신은 가셔도 남기신 고귀한 삶과 겨레사랑의 정신은 후생들 가슴마다에 면면히 이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승리하셨습니다.

김삼웅/독립기념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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