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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4.25 17:00 수정 : 2006.04.26 15:47

불교·그리스도교 두 수행자 책 나와

선(禪)은 오직 마음 안에서 진리를 찾는다. 불교에도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염불하며 가피를 비는 기도가 많지만, 선은 ‘외적인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 대상이 부처라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선방엔 불상이 없다. 선승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 그 또한 자신이 만들어낸 허상으로 여기는 때문이다. 그런데 베트남 출신으로 프랑스 플럼빌리지에서 사는 세계적인 선승 틱낫한 스님이 ‘당신과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는 힘’이란 부제를 단 <기도>(명진출판)라는 책을 펴냈다.

반대로 그리스도교는 일체를 하느님에 의존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오신 하느님’으로 믿는다. 그래서 진리에 이르는 길도 예수 그리스도 및 하느님을 통한다. 따라서 불교 수행자들이 마음을 직관하는 것과 달리 그리스도교 전통의 수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및 하느님을 관한다. 관상수도다. 그런데 수녀 출신으로 40여 년 동안 관상 수도를 해온 수도자 버나뎃 로버츠가 불교의 궁극적 깨달음의 길인 ‘무아’를 체험한 생생한 기록을 공개했다. <어느 관상수도자의 무아체험>(정신세계사)이다.

<…무아체험>을 번역한 박운진씨는 2001년부터 인도 히말라야 다람살라에 머물며 명상하고 있고, <기도>를 옮긴 김은희씨도 히말라야를 여러 차례 여행했다. 우연의 일치일까. 두 책이 나란히 노란 꽃을 표지로 실었다.

■ 틱낫한의 <기도>
선승 틱낫한 ‘기도’
‘신과 나는 둘이 아니다’
내안의 위대한 힘 깨우기
선승인 틱낫한이 <기도>를 쓴 이유는 이렇다. 그는 불교도만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신자를 만날 때도 “기도하라”고 했다. 그런데 가끔씩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며 “기도를 하면 효과가 있긴 있는 거냐”고 반문하는 이들이 있었다. 또 10여년 전 비구니 제자 두 명에게 가톨릭수녀원을 방문케 했다. 거기서 돌아온 이들은 “수녀님들은 예수님을 완전히 믿고 모든 것을 의탁했다”며 “불교도는 모든 것을 자력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배웠는데, 가끔은 그것이 너무 피곤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그런 의문들에 대한 틱낫한의 답이 <기도>인 셈이다.

“우리는 신과 서로 분리된 존재가 아니다. 신의 의지가 우리 자신의 의지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변화하고자 한다면 신도 이를 막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기도란 내 안의 위대한 힘을 깨우는 것임을 깨닫게 한다. 그는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각도가 변하면, 보이는 대상 역시 변화한다”며 “사건을 바라보는 우리의 태도가 변화되면, 신의 의지 역시 변화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우리가 행한 과거 카르마(업)의 결과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또 신과 우리가 둘이 아님을 말한다.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는 예수의 연속이며, 모든 불교도는 붓다의 연속이다.”

그는 “단지 머릿속의 관념적인 대상에게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실존하는 그들 본성에 기도하는 것”이라며 “자신과 대상의 단일함을 이해할 때, 기도는 한결 깊어지고 효과는 강력해진다”고 한다.

틱낫한은 기도가 효과를 낼 수 있는 필수조건은 바로 마음 깊은 곳으로 들어가 에너지를 내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 “‘마음’이라는 발전소에서 나온 에너지가 외부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 버나뎃 로버츠의<…무아체험>
버나뎃 로버츠 ‘무아체험’
수도 깊어지자 무아상태로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

1931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난 버나뎃 로버츠는 10대 후반에 수녀원에 들어가 수도생활을 했다. 어려서부터 신비체험을 했던 그는 수녀원에서 10년 간 수도를 통해 ‘하느님과 일치’를 경험했다. 수도의 목표가 실현되었다는 확신이 들자 그는 자신이 배운 것을 사람들과 공유하고, 삶의 문제들을 사람들과 함께 껴안고자 세상으로 다시 나왔다. 결혼을 해 네 아이를 양육했고, 고등학교, 대학 등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도 관상기도를 계속했던 그는 수녀원을 떠난 지 20여년 뒤 뜻하지 않은 체험들을 하기 시작했다.

2년 동안이나 계속된 이 체험을 통해 그는 ‘하느님과 일치’ 그 자체가 사라지고, 그와 함께 자아도, 하느님도 더 이상 경험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느님과의 일치’를 발견했던 그에게 그 일치마저도 사라져버리는 체험은 당황스러웠다. 그는 이런 경험에 대해 설명해줄 기록을 찾았지만 중세 독일의 신비주의 사상가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에게서 약간의 기록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을 제외하면, 무아상태를 설명해줄 만한 어떤 문헌도 발견하지 못했다. 심지어 동양의 여러 전통 종교에 관한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지침을 찾을 수 없자 결국 모든 것을 그대로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그 길로 이끄는 대로 내맡기며 따라가던 그는 40대에 놀랍게도 바로 이웃이자 친구인 85살 된 루시엘이 같은 체험을 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다다른 곳이 그리스도교를 벗어난 전혀 다른 곳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영적 여정의 마지막 단계이며, 다만 여러 사정들에 의해 철저히 가려져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죽음과 같은 상황을 경험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육체적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은 깊은 정지였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30센티미터 앞의 들꽃을 보고 있었다. 꽃이 웃었다. 꽃은 마치 전 우주로부터의 환영인사처럼 미소를 지었다.”

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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