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08 17:47
수정 : 2006.08.09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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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안거를 마치고 정혜사를 떠나기 전 덕숭산 아래를 내려다보는 선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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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하대지가 서해안까지 확 트여 보이는 충남 예산군 덕산면 덕숭산 정혜사 능인선원. 8일 오전 하안거(음력 4월 보름부터 7월 보름까지 참선 정진)를 난 ‘운수납자’들이 말 그대로 납색 옷을 입고 구름처럼 세상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이날 조계종 산하 94개 비구·비구니 선방에서 2319명의 선승들이 일제히 결제를 마치고 선방을 나서 만행을 떠났다.
결제를 난 선승들은 수좌(首座·선원을 이끄는 선승) 설정 스님의 지도로 매일 새벽 3시부터 밤 9시까지 짜여진 시간에 맞춰 참선해왔다. 이들은 지난 석 달간 산문 밖을 나가지 않은 채 텔레비전과 라디오, 신문, 잡지, 책을 보지 않았다. 세상과 통로를 단절한 채 오직 내면만을 마주한 것이다.
떠나는 납자들에게 덕숭총림 방장 원담 스님은 “해제했다고 해서 방심하지 말라. 생사영단(生死永斷·생사를 영원히 끊는 것)을 해야만 해제이니, 오늘이 다시 시작하는 날이라 생각하라”고 경책한다.
조계종 94개 선방 2319명 여름수행 하안거 해제
법웅 스님 앉아서 장좌불와 “산문 나선 오늘이 다시 시작”
바랑을 메고 정혜사 산문을 나서는 선승들의 발걸음에서 90일 동안의 살림살이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 무게는 무겁지 않다. 밤낮으로 다리를 꼬고 앉았음에도 마치 날다람쥐처럼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무언가를 쌓은 것이 아니라 비운 자만이 가능한 깃털 같은 가벼움이다. 8만4천근의 무게는 오직 화두일심으로 한 근이 되었고, 마침내 이 한 근마저 놓기 위해 백척간두로 나아갔다. 억겁 동안 굴레를 끊기 위한 대결단이 아닐 수 없다.
정혜사 선방에선 숭산 선사의 외국인 제자인 현각 스님과 오광 스님도 함께 했다. 오광 스님은 장이 흘러 내리는데도 이를 감춘 채 정진하다 좌복(방석)에 피가 흥건히 고인 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져 가까스로 목숨을 건지기도 했다. 목숨을 건 정진이다. 그가 병원에 실려가자 선방에선 그의 좌복을 빼버렸다. 그것이 선방의 무서운 법칙이다. 그래서 육신의 죽음조차 무시한 채 생사를 끊고자 했던 그는 중도에 선방을 나온 것이 못내 절통해 병원에서 퇴원한 뒤에도 선방 주위를 돌며 홀로 정진했다.
법웅 스님은 선방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고, 잘 시간이 되면 만공선사가 살던 선방 밑 소림초당에 기거하면서 90일간 한 번도 바닥에 등을 대지 않은 채 잠을 자지 않은 장좌불와를 했다. 그의 눈빛에서 수마를 두 동강 낸 무사의 결기가 번득인다. 스승 숭산 선사가 열반한 뒤 정신적 지주를 잃고 방황하던 현각 스님과 오광 스님에게 “덕숭산이 그대들 은사 스님의 출가본사이니 이곳에서 결제를 나라”고 권유한 사람이 법웅 스님이었다. 외국인으로서 한국의 전통 선방에서 같이 하기가 쉽지 않던 이들은 “격의 없이 외국인 수행자를 한 식구로 받아들여줘 고맙다”며 함께 했다. 그는 점심 공양 뒤 논 밭에서 선승들이 함께 울력할 때 호미와 낫 등을 챙기는 고두 소임을 맡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삶이 엉터리다. 철저히 참회하고 초심으로 정진할 것이다.”
‘하버드대’라든가, ‘유명인’이라는 짐조차 벗어버린 듯 그들 역시 가볍기 그지 없다.
지난해 열반한 조계종 총무원장인 법장 스님을 시봉했던 진광 스님도 법장 스님의 갑작스런 열반의 충격을 딛고 90일 간 좌복에 앉았다. 그는 선방을 나서면서 “우리 스님이 좋아했던 히말라야에서 스님의 유품을 태워드리기 위해 티베트로 떠난다”고 했다.
떠남과 만남, 시작과 끝은 어디인가. 설정 스님은 진짜 수행은 지금부터라며 마지막 죽비를 내리친다.
“화광동진(和光同塵·진리의 빛 그대로 세상과 함께 함)하라.”
예산 덕숭산/글·사진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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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을 나서는 법웅 스님(?앞)과 현각 스님(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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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 덕숭총림은 만공 선사가 기틀다진 선불교 본가
충남 예산 덕숭산은 조선시대 사실상 명맥이 끊기다시피 한 선을 되살려 근대 선의 첫새벽인 경허 선사의 가풍을 잇는 곳이다. 수덕사의 산내 말사인 정혜사는 덕숭산 정상 부근에 있는데, 경허의 제자인 혜월 선사와 만공 선사가 머물면서 납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혜월이 51살에 부산 쪽으로 내려간 뒤 만공이 선원의 기틀을 다졌다. 옛부터 ‘사자의 포효에 백수의 뇌가 파열되며, 사자굴에 다른 짐승은 살 수 없다’고 했다. 만공의 문하엔 새끼 사자들이 몰려들었다. 보월, 금봉, 고봉, 벽초, 혜암, 전강, 금오, 춘성, 원담, 숭산 등 비구 선사와 법희, 일엽, 만성 등 비구니 선사 등 훗날 한국불교의 선을 일으켜세운 기라성 같은 법기들이었다. 따라서 신의 근본도량인 뜻의 선지종찰로 추앙된다. 또 덕숭산이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인도에 있었던 영산회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만공은 선승들을 발심시키는 데 천재적인 기지를 발휘하곤 했다. 당시 내로라 하는 선지식 다섯 명에게 견성을 인가받은 전강선사에게 “네 깨달음은 저 불목하니(절 머슴)보다 못하다”고 단칼에 내리쳐버렸다. 이 말에 분심이 격발된 전강은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처절한 정진 끝에 사자후를 토했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시인인 김일엽이 처음 절을 방문했다가 밤에 화장실에 다녀와 자기 방을 못 찾아 여러 방문을 두드리자 다음날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저 여성이 남자 생각이 나 밤에 이 방 저 방을 기웃거렸다”고 공개망신을 주었다. 만공은 그런데도 일엽이 전혀 동요하지 않자, 그 자리에서 출가를 허용했다. 일부러 망신을 주어 그릇을 실험했다는 것이다.
덕숭가풍을 잇는 설정 스님은 “이제 좀 더 중생 구제에 나서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활발한 선풍이 덕숭산에서 어떻게 세상 속으로 불게 될까.
조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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