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17 14:00
수정 : 2006.08.1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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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크리스챤 아카데미 이사장인 강원용 목사와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주제로 대담을 나누고 있다. / 한겨레 윤운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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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용 목사는 기독교만이 아니라 범종교계의 원로이자 ‘어른’이었다.
그는 ‘기독교 목사’였지만, 박제된 신앙을 거부하고 90평생까지 고뇌하고 변화해 가며 폭을 넓혔다. 그가 지난해 펴낸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서 “삶이란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옛 허물을 벗고 새롭게 성숙해 나가는 과정인지라, 저를 둘러싼 외부의 역사 현실과 삶의 조건들이 크게 변화한 사실 못지않게 저 자신의 내면적 세계에서도 큰 변화와 갈등을 겪었다”고 진솔하게 고백한 그대로였다.
‘살아있는 현대사’로 불렸던 그가 기독교 ‘목사’로서만이 아니라 ‘시대의 목자’로 읽힌 것도 격동하는 시대의 중심에서 고뇌한 때문이기도 했다.
강 목사는 1917년 함경북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에서 그가 열네살 때 그리스도인이 되자 반대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농민의 아들이었던 그는 농촌 계몽의 꿈을 안고 열여덟살에 간도 용정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등과 학창생활을 보낸 그는 학생회장과 종교부장으로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은진중 교사로 훗날 한국기독교장로회와 경동교회를 설립했던 김재준 목사를 만나 종교지도자로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강 목사는 20대 후반 해방공간서부터‘내편이냐, 적이냐’에 대한 양자택일을 거부했다. 김규식, 안재홍, 여운형 선생 등을 보좌하며 좌우 합작을 모색했던 그는 50년대 미국 유니언신학대에 유학해 폴 틸리히과 라인홀드 니이버 교수 등으로부터 극단적 선악 논리에 벗어난 신학을 접하고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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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강원용 목사 /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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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신학은 1965년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설립해 종교 간 대화운동을 시작하면서 빛을 발했다. 그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등 중동지역 사막에서 생긴 종교의 최대 단점은 유일신 신앙으로 인한 배타성이지만, 성경은 배타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기독교를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왔다고 말하곤 했다. 세계에서 발생하는 전쟁의 절반 가량이 종교 갈등으로 인한 것임을 감안할 때 세계적으로 거의 유일한 다종교사회인 한국에서 그의 대화 운동은 가장 절실한 것 이었다. 그는 크리스천아카데미를 통해 불교, 개신교, 가톨릭, 민족종교 등이 서로를 ‘경청’하도록 했고, 다종교들은 이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배우면서 종교간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진보적이었지만, 재야의 투사로 나서기보다는 참여를 통한 개혁을 구실로 박정희 정권과 5,6공 정권에도 간접적으로 참여해 회색분자로 매도되기도 했다. 세계 개신교인을 대표하는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WCC) 총무의 유력한 후보로 거론되다 이 때문에 낙마하기도 했다.
하지만 저명인사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보수로 기운다는 설과 달리 그는 최근까지도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에 대해 진보적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또 원망만을 일삼는 쪽이나 순응만 하는 쪽은 결코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남북 갈등만이 아니라 남남갈등과 보혁 갈등이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는 요즘 강 목사는 ‘온건한 보수’와 ‘합리적 진보’의 만남에 대한 갈망을 유지로 남기고 떠나갔다.
<한겨레>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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