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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17 19:46 수정 : 2006.08.18 01:50

고 강원룡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서울대학교병원 영안실에서 17일 오후 아들 강대인(왼쪽)씨가 조문을 받고 있다 .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59년 크리스찬아카데미 세워 종교계 배타성 허물기 강조
“보혁갈등 접점 갈망” 마지막 소원
“통일 가능성 보고 떠나고 싶은데…” 죽음 예견하듯 홈피에 글남겨


별세한 범종교계 어른 강원룡 목사

17일 타계한 강원룡 목사는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범종교계의 원로이자 ‘어른’이었다. 그는 ‘기독교 목사’였지만, 박제된 신앙을 거부하고 90평생 고뇌하고 변화해 가며 폭을 넓혔다. 그가 지난해 펴낸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서 “삶이란 성장하면서 끊임없이 옛 허물을 벗고 새롭게 성숙해 나가는 과정인지라, 저를 둘러싼 외부의 역사 현실과 삶의 조건들이 크게 변화한 사실 못지않게 저 자신의 내면적 세계에서도 큰 변화와 갈등을 겪었다”고 진솔하게 고백한 그대로였다.

‘살아 있는 현대사’로 불렸던 그는 기독교 목사만이 아니라 ‘시대의 목자’이기도 했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거쳐 오면서 그는 언제나 시대의 중심에 서서 고뇌하면서 역사와 함께 행동해 왔다.

고 강원룡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영안실에서 17일 오후 한 조문객이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자 상주 강대인(왼쪽)씨가 부축하며 자리를 옮기고 있다.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강 목사는 1917년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산골에서 태어났다. 유교적 가풍이 강한 집안이어서 그가 열네 살 때 그리스도인이 되자 집안의 반대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농민의 아들이었던 그는 농촌 계몽의 꿈을 안고 열여덟 살에 간도 용정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문익환 목사, 윤동주 시인 등과 학창생활을 보낸 그는 학생회장과 종교부장으로 일찍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은진중 교사로 훗날 한국기독교장로회와 경동교회를 설립했던 김재준 목사를 만나 종교 지도자로서 싹을 틔우기 시작한다.

강 목사는 20대 후반 해방공간에서부터 ‘내편이냐, 적이냐’에 대한 양자택일을 거부했다. 김규식·안재홍·여운형 선생 등을 보좌하며 좌우 합작을 모색했다. 그는 50년대 미국 유니언신학대에 유학해 폴 틸리히과 라인홀드 니버 교수 등으로부터 극단적 선악 논리에 벗어난 신학을 접하고 귀국했다.

그의 신학은 59년 크리스찬아카데미를 설립해 종교 간 대화운동을 시작하면서 빛을 발했다. 그는 “유대교와 이슬람교 등 중동지역 사막에서 생긴 종교의 최대 단점은 유일신 신앙으로 인한 배타성이지만, 성경은 배타를 가르치지 않았으며, 하나님은 기독교를 위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왔다”고 말하곤 했다. 그는 크리스찬아카데미를 통해 불교, 개신교, 가톨릭, 민족종교 등이 서로를 ‘경청’하도록 했고, 이를 통해 서로 이해하고 배우면서 종교 간 평화의 길을 모색했다.


1970년대에 그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선생 등과 함께 민주화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74년엔 악법철폐, 인권회복 등을 목표로 창립한 민주회복국민회의의 대표위원을 맡았다. 그가 이끄는 크리스찬아카데미는 사회의 양극화와 비인간화 극복을 위해 중간집단 양성교육에도 힘썼다. 이런 활동을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의식화 교육으로 판단해 1979년 한명숙 국무총리 등 당시 크리스찬아카데미 간사 6명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하기도 했다. 고인의 열정은 그 뒤에도 꺼질 줄을 몰랐다. 2000년 10월에는 남북 문제에 대한 우리 내부의 국론통일과 주변 강대국들의 협력을 이끌어내 평화통일을 앞당기겠다는 취지로 사단법인 ‘평화포럼’을 발족시키기도 했다. 그렇지만 고인은 “나는 정치가도 사회운동가도 성직자도 아닌 빈들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소신대로 현실정치와는 언제나 거리를 유지했다.

저명인사들이 나이를 먹을수록 보수로 기운다는 설과 달리 그는 최근까지도 국가보안법과 사립학교법에 대해 한 발 앞선 관점을 견지했다. 그는 또 원망만을 일삼는 쪽이나 순응만 하는 쪽은 결코 시대의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남북 갈등만이 아니라 남남 갈등과 보혁 갈등이 새로운 불씨가 되고 있는 요즘 강 목사는 ‘온건한 보수’와 ‘합리적 진보’의 만남에 대한 갈망을 유지로 남기고 떠나갔다.

“통일된 조국에서 부모의 산소에 성묘를 가고 우리나라가 동아시아의 중심 국가가 되는 일을 내 눈으로 보지는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다만 모세가 이스라엘 민족과 그렇게 돌아가고 싶어하던 가나안을 비스가 봉우리 꼭대기에서 바라보며 후배 여호수와에게 부탁을 하고 죽었던 것처럼 나도 그렇게 멀리서라도 가능성을 보고 세상을 떠나고 싶다.” 강 목사는 죽음을 예견하듯 그의 홈페이지에 이렇게 써 두었다.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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