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7.01.02 18:06 수정 : 2007.01.03 14:36

봉은사 경내로 들어서는 혜해 스님. 선악과 시비의 분별을 떠난 그의 미소는 백마디 말을 무색케한다.

여성 수도자에게 길을 묻다 ② 불교 - 평화불사 혜해스님 /

불교에선 금강산 1만2천 봉우리마다 불보살들이 상주해 있다고 믿는다. 근대의 도인들은 뉴욕의 유엔본부에 이어 금강산에 세계 평화를 이끌 ‘정신의 유엔본부’가 서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기도 했다.

그 금강산에서 마지막 노구를 불사르며 세상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 기도하는 스님이 있다. 경북 경주 흥륜사 조실 혜해(86) 스님이다. 혜해 스님은 한국 불교계에 생존한 스님들 가운데는 드물게 금강산에서 출가했다. 그가 금강산 신계사에 출가한 것은 해방 1년 전인 1944년 7월. 평안북도 정주군 안흥면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조부모, 남동생들과 살다가 남동생을 결혼시킨 뒤 23살에 홀연히 금강산으로 떠났다. 키 1미터50센티미터에도 미치지 못하는 단신의 처녀인 그가 금강산에 들어간 목적은 엉뚱하게도 일제에 신음하는 가족들과 동포들, 조국 강토를 구하기 위해 사명대사처럼 도통해 일제를 이 땅에서 몰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도통하기 위해선 참선을 해야 한다는 선승들의 말에 따라 금강산 유점사에서 참선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 1946년 10월 금강산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왔던 그가 영영 찾을 수 없을 줄 알았던 출가 본사인 금강산 신계사를 다시 찾은 것은 2004년 11월이었다. 조계종 총무원이 북쪽과 협의 하에 금강산 신계사 대웅전을 복원하고 거행한 낙성식 때였다.

그 이후 그는 북쪽과 조계종, 현대아산에 부탁해 신계사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기도해 왔다. 사람과 사람들의 마음이 이렇게 찢기고, 저렇게 찢기는 동안 그의 건강을 염려한 주위의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그는 오직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있었다. 연말에 금강산에서 하산해 경주로 가기 전 서울 강남구 삼성동 봉은사에 열린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송년모임에 들른 스님을 만났다.

-스님, 금강산에서 무슨 기도를 했습니까.
=남북이 하나가 되고, 세계가 평화로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네 나라, 내 나라 할 것 없이 만민이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기를 발원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한다고 평화로워집니까.
=한 사람 한 사람이 마음을 모아가면 언제든 만민 합덕이 될 날이 옵니다.

-왜 화해하지 못하고, 서로 상처를 내고 갈라설까요.
=내 마음대로만 하고, 내 잘났다고만 하니 그러겠지요. 질 줄을 모르기 때문이지요. 지는 게 이기는 줄 모르니께요. 반드시 이겨야만 한다는 것이 바로 전쟁입니다.


-모두 이기려고 하지, 어느 누가 지려고 하겠습니까.
=그러니 중생이지요. 중생은 제 업대로만 삽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살면 싸움이 없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는 못살더라도 남만큼은 살려고 노력해야지요.

-세상은 빈부격차가 심해지고, 갈등은 점점 커져만 갑니다.
=그런다고는 해도, 저 보기엔 그래도 세상은 나아져갑니다. 저만 잘사는 부자가 아니라, 남을 도우려는 부자들이 많아지고 있지않은가요. 이제 진짜 부자다운 부자가 많아지고 있어요. 그리고 세상이 어렵다고만 말고, 아무리 세상이 어렵더라도 우리는 서로 도우면서 삽시다.

-스님께서 도통하려 금강산에 들어간 지 60년이 넘어섰습니다. 도통하셨습니까.
=못했어요. 그러니 깨닫지 못한 것은 중생이나 저나 마찬가지지요.

-그러나 스님의 얼굴엔 불안의 그림자가 없네요. 그런 평화를 어떻게 얻으셨습니까.
=오래 전에 봉암사(경북 문경 희왕산 조계종립 특별선원)에서 ‘철 스님’(성철 스님을 말함)의 법문을 듣고, 다 내가 지어 내가 받는 것임을 확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고통도 내가 짓고 내가 받는 것이라면 누구를 원망할 일이 있겠습니까. 화날 일도 없고, 망상할 일도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자기 때문’아니라 ‘네 탓’하는 업노름에만 익숙한데요.
=참선을 하면 업식이 정화가 됩니다.

-현대인들은 번뇌 망상이 많아 끈기 있게 앉아 참선도 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만약 망상이 없다면 다 도인이 됐게요. 제가 금강산 유점사에 살 때 그곳엔 한 번 눈이 왔다하면 3~4일씩 그치지 않고 내려 지붕에 눈이 산만큼 쌓였어요. 그래도 한번 햇볕이 나면 신기하게도 그 많은 눈이 순식간에 녹아버렸지요.

글 조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사진 김태형 기자 xogud555@hani.co.kr

금강산에서 출가한 비구니계 ‘최고의 선승’

혜해스님은

한국불교 비구니계의 최고령 선승이면서도 언론에 이름 한번 나온 적이 없는 혜해 스님을 기자가 처음 만난 것은 2004년 금강산 신계사 낙성식 때였다. 당시 비구, 비구니 스님을 망라한 조계종 스님들 200여명이 참석했는데, 유독 그가 눈에 띄웠다. 그 뒤 조계종의 중진 선승에게 그를 아느냐고 물었을 때 “비구니 선승 중에선 단연 최고의 선객이지”라고 답했다.

해방 뒤 남쪽에서 효봉 스님과 성철 스님, 향곡 스님 등의 회상에서 평생 참선 정진하고, 1970년대부터 이차돈 성사의 순교터인 경주 흥륜사에 머물고 있는 그는 너무나 겸허하기만 했다. 요즘 불교계 안팎에서 스님들이 지적받는 태도 중 가장 대표적인 게 “아만이 지나치다”는 것이다. 그러나 혜해 스님에겐 대우를 받고자하는 권위의식을 털끝만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서울 봉은사에서 그를 알아본 젊은 비구니 스님들이 한걸음에 달려와 큰절을 올리자 그도 머무름 없이 몸을 일으켜 손자벌은 될법한 스님과 맞절을 하고, 말도 존대했다.

인터뷰 때 그는 “평생 참선했는데 아직까지 못깨달았어요?”하고 물어도 순박한 웃음을 터트렸고, “아미타불(을 부르는) 염불도 안하고 화두만 들고 있다가 열반하실 때 아미타부처님이 마중도 안나오시면 어떻게 해요”라고 해도 “할 수 없지요”라며 어린 아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런 근심 없는 그의 웃음 머무는 곳이 바로 극락이었다.

조연현 기자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