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1.09 20:23
수정 : 2019.01.09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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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이정희 교령이 9일 3·1운동 100돌을 맞아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사진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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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이정희 교령 기자간담회
“483명 정신무장 전국 만세 주도”
‘의암 기념관’ 문 정부 관심 ‘촉구’
3월1일 ‘100주년 시민선언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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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이정희 교령이 9일 3·1운동 100돌을 맞아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사진 조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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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도교 최고지도자인 이정희 교령은 9일 서울 세종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어 “천도교(동학)가 주도한 3·1운동 100돌을 맞았으나 정작 3·1 정신의 뿌리는 왜곡되고 있다”고 밝혔다. 수운 최제우에 의해 1860년 창도된 천도교는 올해로 포덕 160돌을 맞았다.
이 교령은 “3·1운동은 1919년 신도 300만명으로 최대 종교였던 천도교의 3대 교조 의암 손병희 성사가 개신교쪽에 지금으로는 100억원대에 해당하는 5천원을 지원하며 참여시켰고, 서울 우이동 봉황각에서 483명에게 49일 수도를 통해 정신 무장을 시켜 각 지방으로 내려보내 전국에서 조직적으로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당시 의암이 독립선언서 3만5천장을 인쇄해 배포했으며, 이 사실이 사전에 조선인 형사에게 발각되자 그에게 거금을 주며 설득해 위기를 넘겨 거사를 성공시켰다”고 부연했다. 그는 또 “1894년 동학혁명 때 최고 지도자인 동학 2대 교조 해월 최시형에 의해 전봉준이 전라도를 관할하는 남접 통령으로, 의암이 34살에 전라도 외 전국을 관할하는 북접 통령에 임명돼 남북접이 우금치에서 싸웠다. 관군에 패해 해월과 전봉준, 김개남 등 동학지도자들이 모조리 잡혀 참수 당하자 도통을 이은 의암이 제2의 동학혁명으로 준비한 게 3·1운동이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백범 김구가 해방 뒤 귀국해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우이동에 있는 의암의 묘소였다”며 “그때 백범은 ‘의암이 없었으면 3·1운동이 없었고, 3·1운동이 없었으면 상하이임시정부도 없었다’고 했다”고 전했다. 천도교가 대한민국 헌법정신의 뿌리인 3·1운동을 주도하고도, 현재 세력이 약해지면서 실제 역사성까지 왜곡되거나 폄하되고 있는 것을 개탄한 것이다.
이 교령은 “유관순은 16살 때 천안 아우내 장터에서 시위를 벌인 열혈한 만세운동가이지만 3·1운동을 주도한 것은 아니다. 의암의 치밀한 계획 아래 전국적으로 전개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일각에서 의암의 친일을 주장하는 것과 관련해 “일제와 싸운 동학의 지도자이자 3·1운동 33인 대표의 수장으로서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그가 3·1운동 전 일본을 돌아보고 와서 일본의 시스템을 본받아 교육과 조직 등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친일이라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령은 현 정부에 대해서도 서운함을 표출했다. 구한말과 일제 때 동학도 등 항일지사들이 외세와 싸우다 참수를 당한 것과 달리, 정치사회적으로는 친일 행보를 보인 적도 있는 천주교에 서대문역사공원의 시설관리를 맡기면서, 정작 국부와 같은 구실을 한 의암의 기념관을 짓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것이다. 특히 북한에서는 모든 종교 가운데 천도교의 위상이 가장 높고 천도교 청우당이 노동당에 이은 제2정당인데도 지난 9월 평양에서 진행된 남북정상회담에 천주교·개신교·불교·원불교만 참석시키고 천도교를 배제시킨 데 대한 울분도 토로했다.
천도교는 종교계, 시민사회단체와 함께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를 구성해, 3월 1일 100주년 기념대회를 열어 ‘제2의 독립선언서’인 ‘3·1운동 100주년 시민선언문’을 발표하고, 학술대회와 사진전, 만세운동 유적지 답사 행사 등을 펼칠 계획이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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