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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5.05.17 19:32 수정 : 2015.05.17 23:50

5·18민주화운동 35돌기념포럼 발제
1979년 ‘미려도’ 시위 주도로 옥살이
소수자 권리·여성 참정권 신장 앞장
“인권은 역사속에 묻어둔 유물 아냐”

천쥐 대만 가오슝 시장
천쥐(64) 대만 가오슝 시장은 ‘꽃엄마’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이름에 국화라는 글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헌신적으로 민중을 보살펴왔기 때문이다. 그는 29살부터 6년 동안을 감옥에서 보냈지만 한차례도 민중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계엄령 해제로 출소한 이후에도 복지·노동 등 인권을 한단계 진전시키는데 몸을 바쳤다. 2000년 민진당이 선거에서 국민당을 누르고 집권하자 내각에 참여했고, 2006년에는 대만 제2의 도시인 가오슝 시장에 당선했다. 그는 당선 이후 가오슝을 인권도시로 만들고, 시민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여러 시책을 펼쳤다. 이런 인권정책과 현장주의 덕분에 그는 2010년 재선한 데 에 이어 2014년 32명이 숨지고 220여명이 다친 가스폭발사고의 악재를 딛고 3선하는 뚝심을 보였다.

“인권은 역사 속에 묻어두는 유물이 아니라 현재 시민들의 생활 속에서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한다.”

그는 5·18민주화운동 35돌을 앞둔 17일 광주에서 열린 세계인권도시포럼에 발제자로 나서 국가폭력의 상처를 딛고 세계적인 인권도시로 성장한 가오슝의 경험을 밝혔다.

그는 “인권은 도시의 기본가치이고, 정책결정의 도구”라며 “2006년 시장 당선 직후 인권위원회를 설립하고 인권자치조례를 제정하는 등 시민의 기본권을 지키는데 앞장섰고, 공무원에게 인권의 가치를 교육하는데 힘썼다”고 강조했다.

“가오슝은 대만성 출신 주민이 본토 출신 국민당 정부에 맞섰던 47년 2·28 사건 이래 숱한 투쟁에 나섰고, 희생을 치렀다. 이런 과정에서 가오슝은 대만의 어느 도시보다 인권을 존중하는 전통이 생겼다.”

그는 12월을 인권의 달로 정하고 인권백서 발간, 인권학당 설립, 인권상 제정, 인권보도상 선정, 국제토론회 개최 등으로 인권 문화를 확산하는데 관심을 두었다. 도시 안에 이민자 전담사무실을 두고,동성애자 퍼레이드를 열어 소수자의 권리를 옹호하고 배려했다. 도시에 인권안내 자원봉사단을 만들고, 인권도서 출판과 강연을 장려하는 등 인권 사업의 범위를 확대했다.

특히 억압받는 여성의 권리를 신장하기 위해 취직권 보장, 참여권 개선, 여성 우호적 환경 조성, 남성의 가사 참여 격려 등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 사업들의 효과가 나타나면서 9년 연속 여성정책 분야의 골든카네이션상을 대만 행정원에서 받았고, 올해는 더불어 성별 주류화(gender mainstreaming) 추진 분야에서도 골든카네이션상을 수상했다.

기조 발제를 마친 그는 “광주시가 5년 전부터 초청했는데 너무 늦게 왔다”며 “한국 국민과 광주 시민이 정치에 냉담한 대만인들과는 달리 여러명의 독재자에 맞서 줄기차게 투쟁해온데 경의를 표한다”고 말했다.

그가 인권도시를 추진한 배경에는 80년 광주의 5·18민주화운동에 비교되는 79년 가오슝의 ‘미려도(美麗島)항쟁’에 참여한 경력이 깔려있다.

가오슝에선 국민당 정부의 계엄령 치하인 1979년 12월10일 세계인권의 날을 맞아 수만명이 참여하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대만은 미국이 중국과 손잡고 단교를 선언하면서 억압통치의 기반이 심하게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정당활동이 불가능했던 진보인사들은 잡지 <미려도>를 창간해 지부 조직을 갖추고 준정당처럼 활동했다. 이날 시위도 가오슝 중심가에서 미려도가 마련한 강연회에 군중들이 몰리면서 촉발됐다. 시민들은 민주화를 요구하며 밤늦게까지 경찰과 충돌했고 숱한 인사들이 체포됐다. 200여명이 기소됐고, 주동자 12명은 사형 이외에는 형량이 없는 반란죄로 기소돼 군사재판에서 무기징역 등을 선고받기도 했다.

가오슝의 국립 중산대를 졸업한 그도 70년대에 진보운동에 가담했다 미려도 사건의 주동자로 체포됐다. 그는 반란죄로 12년형을 선고받고 87년 계엄령이 해제될 때까지 6년2개월 동안 옥살이를 하는 고통을 겪어야 했다. 석방된 그는 인권운동을 지속했고, 92~94년 대만인권촉진회 회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94년 민진당 소속 첸수이볜이 타이페이 시장으로 당선하는 등 정치지형이 변화하자 타이페이시와 가오슝시에서 사회복지국장을 지냈다. 2000년 민진당이 총통선거에서 승리하자 내각에서 6년 동안 노동부 장관을 지내며 행정경험을 쌓았다. 이후 2006년 지방선거에서 정치적 고향인 가오슝의 시장에 도전해 당선하며 인권친화적인 도시를 만드는데 팔을 걷어부쳤다.

그는 “가오슝은 광주처럼 비극을 통해 인권과 평화의 소중함을 깨달은 도시”라며 “도시의 역사와 시민의 기질, 인권실현 시책 등이 엇비슷해 무한한 동질감과 연대감을 느낀다”고 했다.

“평소 다음 세대가 이전 세대의 투쟁과 희생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관심이 지대했다. 16일 5·18묘지를 방문했을 때 전국에서 찾아온 여러 도시의 젊은이들을 만났다. 이들이 묘지를 찾아 정성껏 꽃을 바치고 다함께 노래를 부르는 걸 보고 가슴이 뭉클했다.”

광주/안관옥 기자 okahn@hani.co.kr, 사진 세계인권도시포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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