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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병철 국가인권위원장이 2012년 국회 국정감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현 위원장은 연임에 성공해 6년 임기를 마친 뒤 8월12일 퇴임할 예정이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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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첫 임기조차 못 채울 것 같았던 그가
연임까지 하며 6년 ‘최장수’ 뒤 퇴임
오염된 프레임으로 ‘인권 피로감’ 유포
스스로 반인권적 언어폭력 일삼기도
한국은 인권 이름으로 인권 조롱하는 사회 전락
“초등학교의 일기장 검사는 아동의 사생활과 양심의 자유를 침해할 소지가 크다.”
10년 전인 2005년 4월 국가인권위원회는 교육인적자원부 장관에게 초등학교의 일기쓰기 교육을 아동 인권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개선하라는 ‘의견표명’을 했다. 사상전향서를 쓰지 않고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는 비전향 장기수 할아버지의 ‘연관 검색어’나 마찬가지였던 양심의 자유가 삐뚤빼뚤 서툰 글씨로 일기를 쓰는 초등학생들에게도 똑같이 보장돼야 한다는 결정이었다.
일기쓰기의 교육적 효과를 둘러싸고 한바탕 논란이 일었지만, “초등학생한테 무슨 인권이냐”고 반박하는 이는 없었다. 인권이 정치·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을 위한 특별한 권리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동등하게 누려야 하는 보편적 권리라는 것을 대중이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학습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보호하고 그 수준을 향상시킴으로써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실현하고 민주적 기본질서의 확립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인권위법 제1조) 2001년 11월 출범한 인권위가 제구실을 할 때였다.
일기장 검사 금지, 살색은 연주황으로…
일기 검사에 대한 결정 말고도 인권위가 일반 대중의 인권 감수성을 고양한 일은 손에 다 꼽지 못할 정도다. 크레파스의 ‘살색’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게 대표적이다. 크레파스 등 공산품의 색깔명을 정하는 기술표준원이 1967년 일본이 쓰는 색깔 이름을 단순 번역하는 과정에서 명명한 ‘살색’에 대해 “황인종과 피부색이 다른 인종에 대해 합리적인 이유 없이 헌법 제11조가 보장한 평등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인권위 결정이 2002년 7월 나왔다. 같은 해 11월 기술표준원은 살색 대신 ‘연주황’을 국가 공업 표준으로 정했다.
장애인 차별에 반대하는 양심적 시민들조차 ‘장애=비정상’이라는 차별적 인식에 갇혀 있던 모순을 꼬집은 것도 인권위다. 인권위는 2002년 11월 초·중·고 교과서의 몰인권적 표현 13가지에 대한 수정 권고를 했다. 당시 “자질이나 능력이 정상인과 대등하다면 장애인이라고 해서 불이익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교 1학년 사회 교과서)는 표현에 대해 인권위는 “정상인에 대비해 장애인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장애인이 마치 비정상인이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다. 인권위는 분명 ‘깨어 있는 시민’의 인권 의식을 증진하는 데 기여하는 어엿한 국가인권기구였다.
6년 임기를 마치고 8월12일 퇴임하는 현병철 인권위원장에 대한 ‘고별’ 기사를 쓰면서, 고릿적 인권위의 역사를 장황하게 회고하는 이유가 있다. 누구도 인정하지 않았던 현병철 위원장이 그 자체로 한국 인권의 역사가 됐기 때문이다.
5명의 인권위원장 가운데 유일하게 현병철 위원장은 3년 임기를 꽉 채우고 연임까지 성공해 6년 동안 국가인권기구의 수장을 지냈다. 2011년 출범해 올해로 14년차를 맞는 인권위 역사의 절반 가까이를 현병철 위원장이 채운 셈이다. 그와의 이별을 계기로 ‘현병철 체제’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시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깜둥이 같이 살고… 야만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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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권사는 현병철 위원장 전후로 ‘역변’했다. 그가 남긴 인권의 유산에 대한 다양한 평가가 나오겠지만, 인권에 대한 대중의 인식은 가장 뚜렷한 역변의 결과다.
김형완 인권정책연구소장은 “성소수자 혐오 세력 등이 인권의 용어로 인권의 가치에 반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현 위원장이 남긴 가장 큰 해악은 인권의 오·남용 구조를 구축해 인권에 대한 사회적 피로, 시민적 피로를 부른 것”이라고 말했다.
현 위원장과 함께 인권이 거론되면서부터 인권은 대중에게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됐다. 재한몽골학교의 몽골인 학생들 앞에서 “야만족이 유럽을 200년간 지배한 건 대단한 일”(2010년 4월)이라고 하거나 사법연수원생과의 간담회에서 “우리 사회는 다문화 사회가 되었다. 깜둥이도 같이 살고…”(2010년 7월)라는 반인권적 발언을 하고도 현 위원장은 사퇴는커녕 사과도 하지 않았다.
인권 의제가 약자와 소수자의 권리를 보호하는 본래적 의미와 상관없이 권력 집단의 곤경을 모면하는 변명거리로 오염된 것 역시 현병철 체제의 과오다. 현 위원장은 인권에 대한 해괴한 해석으로 조롱당한 일이 많았다. 2010년 11월 취임 1년 만에 상임위원을 비롯한 인권위원들이 대거 사퇴하면서 용퇴 위기에 몰렸을 때 발표한 성명이 대표적이다. 그는 성명에서 ‘위원회의 독립성은 정부뿐 아니라 어떠한 외부의 힘으로부터도 독립되어야’ 한다는 소신을 밝혔는데, 여기서 ‘외부’란 그의 자질을 문제 삼는 비판세력을 지칭한 것이었다. ‘독립성’을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이용한 것이다.
현병철 체제가 불러온 ‘오염된 인권 프레임’은 보수 정치인과 혐오 세력으로 확산됐다. 박근혜 대통령이 후보 시절 대선 개입 논란의 한복판에 있던 국가정보원 직원 김아무개씨 사건을 여성 인권 문제로 호도한 것 역시 ‘현병철 프레임’의 하나였다. 이제는 성소수자 혐오 세력이 탈동성애를 돕는 게 성소수자 인권 보호라며 버젓이 국회에서 토론회를 열고 있다. 명숙 인권운동사랑방 활동가는 “과거의 인권위라면 성소수자를 비롯한 세월호 유가족, 여성 등 사회적 약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표현의 자유와 어떤 점에서 다른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서 권고를 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청문회에서 “그 정도로 투기하고 표절했으면”
애초 현 위원장이 인권위원장 임기를 채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2012년 연임을 위한 인사청문회 현장에서는 “그 정도로 투기하고 논문을 표절했으면 그 자체만으로도 여기서 더 이상 진도 나갈 필요 없이 그만둬야 한다”며 자진 사퇴를 요구하는 새누리당 의원도 있었다. 이혜훈 당시 새누리당 최고위원까지 현 위원장의 자진 사퇴를 촉구할 정도였다.
2009년부터 연임 무렵까지 ‘인권위 독립성 수호를 위한 법학교수 모임’을 꾸려 현 위원장 사퇴를 위해 일했던 정태욱 인하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그가 인권위원장이 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고, 연임되는 것도 놀라운 일이었다. 인권위원들이 대거 물갈이되면서 일개 행정위원회로 전락하는 것까지 인권위가 그렇게 급속하게 후퇴할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했다.
현병철 체제의 유지는 그 개인의 독선과 아집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인권적 조건 때문에 가능했다는 게 정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시민사회가 작은 성취에 자만해 사태를 너무 낙관했다. 국익, 권위주의, 위계질서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서 인권은 여전히 취약한 의제였다”고 말했다.
현 위원장 이후 한국 사회의 인권 수준은 사실상 인권위 설립 이전으로 퇴행했다. 특히 보수 세력의 퇴행은 심각한 수준이다. 인권위원 11명(인권위원장+차관급 상임위원 3명+비상임위원 7명) 가운데 새누리당이 추천해온 인물들의 면면이 그렇다. 지난해 2월 새누리당은 총선에 출마했던 검사 출신 정치인 ㅇ위원을 차관급 상임위원에 추천했다. ㅇ위원은 내년 총선에 출마하기 위해 인권위원을 중도 사퇴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인물이다.
현 위원장 이전에는 새누리당도 인권위원 자리를 정치인들의 이력 관리 과정으로 여기진 않았다. 차관급 상임위원(2009년 7월~2012년 7월)으로서 현 위원장의 독단과 몰인권적 행보를 견제했던 문경란 전 위원은 노무현 정부 시절 한나라당 추천으로 인권위에 합류한 인물이었다.
이에 앞서 2001년 인권위가 출범할 때는 고 김근태 의원의 남영동 고문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을 비판하며 고문 경찰에게 중형을 선고한 유현 판사와 여성법률상담소 운영으로 여성인권 분야에서 두루 인정받았던 김덕현 변호사 등을 한나라당이 인권위원으로 추천한 바 있다. 인권에 대한 그 정도의 양식을 보수 정당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새누리당은 최근 숱한 막말로 대중에게 각인된 김진태 의원을 당 인권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는 박근혜 대통령의 해외 순방을 동행하던 중 프랑스 파리와 영국 런던 등에서 벌어진 대선 개입 규탄 촛불시위 참가자들에게 ‘법무부를 시켜 대가를 치르게 하겠다’는 발언을 했던 인물이다. 장은주 영산대 교수(철학)는 “반인권적 발언을 서슴지 않았던 사람을 당 인권위원장으로 임명하면서 (새누리당이) 인권을 조롱하고 있다. 그게 조롱인지도 모른다는 게 현재 보수의 수준이다”라고 지적했다.
‘막말’ 김진태 의원이 당 인권위원장
현병철 체제가 남긴 진짜 문제는 진보와 보수를 뛰어넘는 인권 가치가 제대로 뿌리내릴 기회가 사라진 데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현병철 위원장을 임명하면서 북한 인권 개선에 나서달라고 주문했다. 연임의 이유도 북한 인권 개선의 공로였다. 하지만 현병철 체제는 북한 정권을 자극해 한반도의 긴장을 부추기는 현재의 북한 인권 담론을 극복할 수 있는 인권적 프레임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국제사회의 북한 인권 운동가들이 소련과 동구권 붕괴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고 평가받는 1975년 헬싱키 선언을 벤치마킹한 ‘헬싱키 프로세스’를 고민하는 국제적 추세도 못 따라가고 있다. 탈북자 1만5천여 명에게 친필 편지를 보내 북한에서 당한 인권침해 사례를 진정하라고 해놓고 접수된 진정 사건을 각하하는 ‘웃픈’ 일들로 구설에만 올랐을 뿐이다. 명숙 활동가는 “북한 주민의 자기주체성과 자기결정권에 기반한 보수의 북한 인권 콘텐츠가 가능할 텐데 그런 걸 만들어낼 의지조차 없었다”고 말했다.
진명선 한겨레 경제사회연구원 선임연구원
toran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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