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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03 19:19 수정 : 2016.11.04 08:22

[짬] 함석헌기념사업회 김종태 이사장

함석헌기념사업회 김종태 이사장

함석헌(1901~89) 선생은 평생 나라의 독립과 민주화를 위해 힘썼다. 그는 또한 공동체운동가이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자서전을 번역하기도 했던 간디의 아슈람 공동체를 본뜬 삶을 꿈꿨다. 함 선생이 천안에서 일군 씨알농장(1956~73)은 그런 지향의 결실이었다.

씨알농장 초기에 함 선생과 노동과 숙식을 함께 한 이들이 있다. 중앙신학교 재학생이던 김종태와 홍명순이 그들이다. 둘은 천안 시내 집들을 돌며 인분을 농장으로 퍼날랐다. 60년이 흘러 김종태(82)씨가 최근 함석헌기념사업회 7대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를 지난 2일 서울 서교동 사업회 사무실에서 만났다.

신학대때 함 선생 강의듣고 ‘빠져’
씨알농장 일꾼 자청해 ‘동고동락’
“천안 시내돌며 인분 퍼날랐지요”

제대뒤 농장…하산뒤 사회복지 활동
6월 총회 이사장 선출에 망설이기도
“꿈에 ‘바통 이어라’ 스승 말씀 들어”

“제가 강릉농고 다닐 때만 해도 싸움대장이었죠. 그러다 고3 때 이호빈 목사의 설교를 듣고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서울의 중앙신학교에 입학한 그는 특강에서 함 선생을 처음 만났다. “함 선생은 칠판에 <노자> 첫 글귀인 ‘도가도비상도 명가명비상명(道可道非常道 名可名非常名)’을 적었죠. 노자 강의를 하면서 평화에 대한 말씀과 민중이 깨어야 된다는 얘기를 해주셨죠. 그때 이후로 함 선생에게 빠진거죠.”

졸업할 무렵 함 선생이 씨알농장을 하려는데 사람이 없다는 얘기를 듣고 “내가 가겠다”고 자원했다.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를 갔는데, (이 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없다는 걸 뒤늦게 알았어요. 그렇다면 목사 대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사회사업가가 되겠다고 생각했죠.”

그는 그시절 함 선생을 이렇게 기억했다. “새벽 4시면 일어나 명상을 하시고 좋아하던 찬송가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내 주를 가까이’를 부르셨죠. 그리고 성경 말씀을 해주시고 일하러 나가셨어요.” 함 선생은 1일1식을 했다. “함 선생의 은사인 유영모 선생은 40대 때부터 1식을 하셨죠. 유 선생께서 1끼를 들고도 더 빨리 삼각산에 오르는 걸 보고 50대이던 함 선생도 1식을 하기로 결심했다고 합니다.” 김 이사장도 스승을 본받아 천안 농장 시절에 1년동안 1식을 했다. “1식을 하면서 위장병에 걸렸어요. 이걸 고치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를 했죠. 농장 시절에 배가 너무 고파 홍명순과 함께 처마에 걸린 땅콩 씨앗을 몰래 먹기도 했어요. 함 선생께서 뒤늦게 알고 대노하셨죠. 그렇게 화내는 모습을 처음 보았어요.”

그는 스승의 농사법을 이렇게 소회했다. “농사일도 잘하셨어요. 고랑 만들 때 삐둘빼뚤한 걸 견디지 못하셨어요. 똑바로 해야 합니다. 김도 저보다 빨리 매시면서 풀 하나도 남기지 않으셨죠.”

그가 입대한다는 얘기에 스승은 한숨만 쉬었다. 그런 스승의 마음을 그는 뒤늦게 알았다. 동료 홍명순이 군 입대를 거부해 6개월 실형을 살았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제대 뒤 강원도 간성군 진부령 흘리에서 스스로 씨알농장을 개척하고 있을 때 그는 스승에게서 이런 편지를 받았다. “종태! 잘 싸워야해. 이때까지는 도리에 어그러진 전쟁하기 위해 이성을 무시하고 사람을 흙덩이로 만들어 복종을 시키려던 군대의 군인 노릇을 했지만 이제는 평화의 군인이 돼야해, 창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칼을 쳐서 낫을 만든다던 이사야의 이상을 그대로 걷기 시작한 그대 아닌가? (…) 멧돼지도 잡지만 정말 멧돼지를 잡아야지, 평화의 새시대의 씨알의 밭을 해하는 멧돼지 말이야.”

그가 ‘안반덕’이라고 이름 지은 이 농장을 함 선생이 직접 찾아온다고 했을 때 감격했다. 보름 동안 20리 산길을 좌우 2미터 너비로 사람이 지나갈 수 있도록 넓혀 냈다고 했다. “산길을 내면서 호랑이도 보았죠. 함 선생님은 산을 좋아하셨어요. 제가 산을 내려온 뒤에도 함 선생님이 한동안 (안반덕 농장일에) 관여하셨죠.”

김 이사장은 65년 하산한 뒤 사회복지 사업에 전념했다. 67년부터 93년까지 홀트아동복지회에서 일했고, 87년부터 2007년까지 사회복지법인 평화의 마을(전 대전애육원) 대표이사를 지냈다. 이런 사회복지 활동을 인정받아 2006년 동아일보사가 주는 인촌상을 받기도 했다. 이 상의 첫 수상자는 스승인 함석헌이었다.

김 이사장은 스승의 사상을 이렇게 정리했다. “첫째가 참을 찾는 정신입니다. 옳고 그름을 제대로 판단해 옳은 길을 가자는 것이죠. 둘째가 비폭력 평화사상입니다. 그다음이 같이살기 운동이죠.”

그는 스승을 ‘실천하는 혁명가’라고도 했다. “글을 쓸 때는 밤을 새워가면서 쓰셨죠. 강의하는 걸 보면 메모 하나 없이 2~3시간을 하셨어요. 그런 분이 없었어요. 또 인간을 너무 사랑하셨어요. 책 읽는 걸 좋아해서 안반덕에 계실 때 시간만 있으면 (힌두교 경전) <바가바드 기타>를 읽으셨죠.”

그런데 지난 6월 함석헌기념사업회 총회에서 7대 이사장으로 선출된 뒤 그는 망설였다고 했다. 마침 국외에 머물고 있었다. “나이도 많아 고심이 됐어요. 그런데, 지난 7월 대전 평화의 마을 아이들과 독도 탐방을 했어요. 울릉도에서 자는데 꿈에 함 선생님이 나타나 ‘이 바통을 놓치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는 ‘스승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그는 함 선생 사후 씨알문화사업회 실행위원장(95~98)과 기념사업회 이사(98~)로 일해왔다. “실행위원장 시절 제가 주도해 원효로 4가 함 선생 사저에 기념관 격인 가건물을 세웠어요. 보람이 컸죠.”

그는 지금도 ‘같이살기 운동’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씨알평화동산을 만들어 ‘같이살기 평화운동’의 기틀을 만들고 싶어요. 함 선생님의 비폭력 사상을 실천하고 우리 사회가 바로 나아가도록 하는 데 기여하는 공동체를 만들고 싶어요.”

글·사진 강성만 선임기자 sungm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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