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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인 윤정헌씨가 지난달 30일 고병천에 대한 구형 공판에 참석한 뒤 서울중앙지법 출입구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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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커버스토리
간첩조작 피해자 윤정헌의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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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동포 간첩조작 피해자인 윤정헌씨가 지난달 30일 고병천에 대한 구형 공판에 참석한 뒤 서울중앙지법 출입구 앞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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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에는 각종 정보기관 중에서도 군 보안사령부가 가장 힘이 셌다.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12·12 쿠테타(1979년)로 대통령이 됐기 때문이다. 보안사는 박정희 정권 때도 간첩단 사건을 조작했지만, 전두환 정권 때는 최고 권력자의 후원을 배경 삼아 마구 설쳤다. 그들의 먹잇감은 국내에 연고가 없는데다 우리말도 잘 못하는 재일동포 유학생이었다. 정권이 어려울 때마다 재일동포 간첩단이 만들어졌다. 당시 ‘간첩 만들기’의 최고 베테랑이었던 보안사 수사관 한명이 30여년 만에 법의 심판대에 섰으며, 지난달 초 법정 구속됐다.
보안사령부(기무사령부의 옛 이름) 대공처 수사관이었던 고병천(79).
지난달 30일 오전 풀색 수의를 입은 고병천이 서울 중앙지방법원 501호 법정의 피고인석에 앉았다. 법정에서 위증을 한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그는 지난달 2일 재판 도중에 구속됐다. 이날 재판에서 고병천은 과거 보안사 수사 과정에서 윤정헌(65)과 이종수(60) 등에게 물고문과 통닭구이 고문 등이 있었는지를 묻는 검사의 신문에 모두 “인정한다”고 말했다. 징역 1년을 구형받은 뒤 최후 진술에서는 “먼저 윤정헌씨에게 사죄를 드리고, 다른 모든 분들에게도 사죄를 드린다”며 “염치없이 선처를 바란다”고 밝혔다.
고병천은 1966년 육군 방첩대(보안사의 전신) 군무원으로 출발한 뒤 1972년부터 1995년 퇴직할 때까지 줄곧 보안사 수사과에서 일했다. 군과 관련된 방첩 사건이나 정보 업무가 본래 임무였지만, 그가 이름을 날린 건 ‘간첩 만들기’였다. 그것도 군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민간인, 그중에서도 주로 대학생들을 간첩으로 둔갑시켰다. ‘간첩 창조’의 공을 인정받아 훈장도 여러번 받았다. 1970~80년대 경찰의 남영동 대공분실에 이근안이 있었다면, 보안사의 서빙고 분실과 장지동(서울시 송파구) 분실에는 고병천이 있었던 셈이다. 그는 얼마나 ‘수완’이 좋았던지 “베테랑”(김병진, <보안사>)으로 불렸다. 김병진은 1983년 보안사에 연행돼 고문을 받고는 강제로 특채돼 1985년 말까지 통역요원으로 근무했다. 이듬해 일본으로 돌아간 김병진은 자신이 보고 겪은 내용을 1987년 책(<보안사>)으로 출판했다. 수사관의 실명을 고스란히 적은 이 책은 간첩 조작 사건의 재심 재판에서 주요 증거가 됐다.
고병천을 법 심판대에 세운 건 ‘촛불’
이날 재판에서 고병천은 한껏 고개를 숙였지만, 법정 분위기는 냉랭했다. “보안사 전체 대표라고 생각하면 죽을 때까지 감옥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윤정헌) “용서라는 글자가 우리에게는 없다.”(박박) “앞으로 고문 없는 사회를 위해서라도 그를 절대 용서하면 안 된다.”(강종건) 재일동포 피해자들은 한결같이 엄벌을 요구했다. 피해자 쪽 변호사들도 그의 사죄는 위장쇼일 뿐이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반성문을 법원에만 제출했지 피해자분들께는 직접 한 적이 없다. 판사님에게만 잘 보여서 집행유예나 선고유예로 빠져나가려는 전략이다.”(신윤경) “본인이 저질렀던 과거의 악행들에 대한 한점의 변명이 아니라 진정한 진실을 드러내고 사죄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피해자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사죄를 한다는 느낌을 전혀 느낄 수가 없다.”(장경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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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불법을 저지르면 끝내 벌을 받는다는 작은 교훈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또 고문 등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1984년 고문에 의해 간첩으로 조작됐던 윤정헌(오른쪽)씨가 지난 4월30일 고문 수사관이었던 고병천씨의 위증죄 구형 공판을 마친 뒤 서울지방법원 앞에서 간첩 조작 피해자였던 김원중(가운데), 강종건(왼쪽)씨와 함께 얘기를 나누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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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재판장석에 앉은 판사 이성은은 피해자들의 진술을 듣고 눈물을 흘렸다. “인권의 최후 보루임에도 법원이 제 역할을 다 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법원에 이 사건을 믿고 맡겨주신 것을 잊지 않고 결론을 내보겠다”고 말했다.
오는 28일 예정된 선고 공판에서 고병천에 대한 결론이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서는 단죄를 받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 보인다. 그 경우 보안사 수사관이 고문과 관련해 처벌되는 것은 서울 양천구청장을 지낸 추재엽(63·2013년 유죄 확정)에 이어 두번째다. 추재엽은 2010년 3선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던 과정에서 과거의 고문 전력을 폭로한 상대 후보와 다투다가 위증죄로 처벌받은 데 비해, 고병천은 피해 당사자의 요구로 단죄받는다는 점에서 무게가 다르다.
1984년 보안사에 강제 연행돼
43일간 고문 끝 간첩으로 조작
‘방북 사실’ 허위로 드러나고
신문기사가 기밀로 둔갑했어도
법원은 징역 7년 실형 선고해
일본의 차별 피하려 모국 유학
88년 6월 석방됐으나 복학 무산
‘의사 돼 고국 정착’ 꿈 날아가
일본 귀국 뒤 각종 일자리 전전
진실화해위원회 조사 끝난 뒤
2010년 서울지법에 재심 신청
‘베테랑’ 불렸던 수사관 고병천
“고문 없었다” 법정서 허위 증언
재심 무죄 받은 뒤 위증죄로 고소
34년 만에 고병천 처벌 눈앞에 둬
보안사 출신은 추재엽 이어 두번째
“고문한 자 보는 게 너무 힘들지만
역사 교훈 남기고자 끝까지 갈 것”
보안사의 고문 가해자 고병천을 30여년 만에 정의의 심판대에 세운 이는 윤정헌이다. 윤정헌을 지난달 26일 일본 도쿄의 자택에서 만났다.
- 비록 위증이라는 죄목이기는 하지만 고병천이 무려 34년 만에 과거 고문을 자행한 죗값을 치르기 일보 직전이다. 그를 어떻게 고소하게 됐나?
“간첩 조작 사건에 대한 재심을 요청해서 2010년 말부터 재판이 서울지법에서 시작됐는데 그때 검찰 쪽 증인으로 고병천 등 4명이 신청됐다. 다른 사람은 법정에 안 나왔는데 고병천만 유일하게 출석해서 보안사 수사 때 나에 대한 고문이나 구타 등의 가혹행위가 일체 없었다고 새빨간 거짓말을 했다. 안 나와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 자리였다. 내 재심 재판을 불리하게 만들기 위한 의도적인 행위였다. 그때 변호인단을 이끌고 있던 이석태 변호사가 위증으로 고소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약칭 진실화해위원회)가 ‘재일동포 유학생 윤정헌 간첩 사건’은 조작됐다는 결론을 2009년에 내리자, 고병천은 이의 신청을 했다. 그의 요청은 기각됐다. 고병천은 비슷한 사건인 이종수, 박박 간첩조작 사건 등에 대한 진실화해위원회의 결론에 대해서도 이의를 제기했다.
- 그래서 바로 고소(2012년 6월)했나?
“큰 흐름으로 보면 고소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솔직히 실행하기까지 고민이 많았고 그 이후에도 매우 힘들었다.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기에 명예회복이 된 만큼 개인적으로는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고병천을 보는 것 자체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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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조작의 당사자였던 전직 보안사 수사관 고병천(왼쪽)씨가 피해자인 윤정헌씨를 지난 3월15일 서울지방법원 501호 법정 앞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는 “오늘 법정에서 사과하려고 했다”고만 했을 뿐 윤씨에게 직접 사과하지는 않았다. <프레시안>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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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고병천에 대한 고소 사건은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 내내 검사의 서랍 속에서 잠잤다. 사건이 서울지검 공안부로 넘어갔지만, 검사는 변호인도 없는 상태에서 고병천과 윤정헌을 한차례 대질하게 했을 뿐 추가 조사를 계속 미뤘다. 고소 대리인인 변호사 장경욱은 검찰을 압박하기 위해 고병천에 대한 민사소송부터 제기(2014년 12월)했다. 민사재판에 별로 큰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서울 동부지법에서 반전이 일어났다. 판사 김은성은 2017년 1월 판결에서 고병천의 고문 행위와 재심 재판에서의 허위 증언을 인정하고, 그로 인해 윤정헌에게 정신적 고통을 준 데 대한 배상(3000만원)을 명령했다. 장경욱은 판결문을 곧바로 서울지검의 담당 검사에게 제출하면서 “고병천을 기소하지 않은 채 공소시효가 지나간다면 직무유기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결국 고병천은 위증죄에 대한 공소시효(7년)가 끝나기 이틀 전인 지난해 12월13일 기소됐다. 장경욱은 “촛불의 힘이자, 지난해 5월 정권교체로 인해 검찰 수뇌부가 바뀐 덕택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공포의 엘리베이터실
- 고병천이 법정 구속까지 됐는데 심경이 어떤가?
“법원이 많이 바뀐 것 같아서 재판 자체는 매번 흥미 있다. 판사가 피해자의 입장을 잘 이해해주고 재판을 공정하게 진행해서 고맙다. 고문으로 간첩이 된 뒤에 엉터리 재판을 받았던 기억과 대비되면서 지난번 재판(4월2일) 때 피해자 진술을 하다가 나도 모르게 통곡하고 말았다. 매번 공판에 참석하긴 하지만, 나 없이 제발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이 늘 든다. 고병천을 매번 봐야 하기에 재심 때보다도 이번 재판이 정신적으로 훨씬 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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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봐도 죄가 아닌 것을 뻔히 알 수 있는 시시한 내용이었는데도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 검사와 판사가 너무 밉더라. 수사관보다 더 밉다.” 보안사의 간첩 조작 피해자인 윤정헌씨가 지난달 26일 일본 도쿄의 자택 앞 골목길에서 사건을 겪은 심경을 얘기하고 있다. 윤씨는 1984년 보안사에 끌려가 간첩으로 조작된 뒤 법정에서 7년형을 선고받았다. 도쿄/김종철 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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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헌에게 잊지 못할 악몽이 시작된 것은 전두환 정권의 폭압정치가 한창이던 1984년 8월27일이었다. 부모님이 사는 일본 오사카에서 방학을 보내고 돌아온 지 며칠 안 됐을 때였다. 우편물을 부치러 우체국에 들른 뒤 학교에 가서 성적표를 받아 서울 동숭동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집 앞에서 기다리던 남자 3명이 다가와 동대문경찰서에서 왔다면서 동행을 요구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아내에게 얘기라도 하고 나오겠다고 했지만, 이들은 잠깐이면 된다며 막무가내로 데려갔다. 1982년 이웃의 소개로 만나 결혼한 부인(유란·61)은 임신 5개월의 새댁이었다. 그를 연행한 사람은 보안사의 대공처 수사과 학원반(제2계) 소속 수사관인 이덕룡과 최홍상, 운전수였다. 학원반의 반장인 고병천의 부하였다. 눈가리개를 하고 끌려간 곳은 서울 송파구 장지동의 보안사 분실이었다. 윤정헌은 이곳에서 무려 43일 동안 불법적인 구금 상태에서 각종 고문과 취조를 당했다. 결국 그들이 요구하는 거짓 자백을 한 뒤에야 보안사를 벗어날 수 있었다.
- 그들이 무슨 근거라도 갖고 체포했나?
“전혀 없었다. 건수를 올리려고 당시 가장 약자였던 재일동포 유학생을 노린 것이었다. 끌려가자마자 처음부터 다짜고짜 ‘니가 왜 온 줄 알지’라면서 간첩활동을 자백하라고 했다. 그런 것이 없다고 하면 주먹이나 몽둥이로 온몸을 마구 때리고, 그래도 부인하면 ‘엘리베이터실’로 데려가서 고문했다.”
- 엘리베이터실은 어떤 곳인가?
“큰 방 중앙에 철제의자가 하나 놓여 있고, 그 옆에 의자를 작동시키는 기계장치가 놓여 있었다. 옷을 다 벗기고는 의자에 앉힌 다음에 손발을 의자에 묶는다. 그러고는 뒤로 젖혀서 수건을 얼굴에 덮은 뒤 주전자 물을 얼굴에 쏟아부었다. 그래도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엘리베이터 의자를 작동시킨다. 의자는 그 자리에서 1~2층 깊이의 지하로 내려간다. 아래에서는 물이 찰랑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 방 아래로 한강이 흐른다. 너 하나 죽여서 강물에 던지면 아무도 모른다’고 겁을 준 상태이기에 그때 느끼는 공포심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나는 그 정도로 그쳤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 의자에서 전기고문도 받았다.”
윤정헌은 더 버틸 수 없었다. 원하는 대로 간첩활동을 했다고 진술했다. 그들이 만들어낸 간첩활동은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나온 기사와 서울시내 호텔의 홍보용 안내서를 일본에 있는 공작지도원에게 건네줬다는 거였다. ‘전두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 2525명이 투표해 2524표를 획득하여 압도적 지지로 제11대 대통령 당선’(<조선일보> 1980.8.28) ‘육군 계엄 보통 군법회의에서 김대중은 사형, 문익환 등 4명은 징역 20년 등 구형’(<동아일보> 1980.9.11) 등의 기사 복사본이 윤정헌이 간첩이라는 증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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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헌씨는 1984년 보안사의 서울 송파구 장지동 분실에서 43일간 고문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수사관들은 이른바 ‘엘리베이터실’에서 피해자들을 의자에 앉힌 뒤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한 뒤 의자를 지하로 떨어뜨려 공포감을 극대화했다. 윤씨가 2008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상 조사를 받을 때 그린 엘리베이터실의 모습으로, 신청인 진술조서에 첨부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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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에 가공인물 만들고 ‘방북’ 허위 자백
고문에 못 이겨 허구의 공작 지도원도 만들어야 했다. 교토대학 동창생의 이름에 일본식 성을 붙여서 요시야마 마사오라는 사람을 창조했다. 보안사는 가공의 이름인 요시야마 마사오를 윤정헌이 대학 1학년(1973년) 때 학교 서클인 조선문화연구회에서 한두번 만났던 변희재라고 꾸몄다. 윤정헌은 대학 때 이후 11년간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던 변희재를 방학 때마다 신문기사 오린 것과 호텔 안내서 등 ‘국가 기밀’을 비밀리에 전달했다고 조서를 써야 했다. 1980년대에 <조선신보> 기자로 도쿄에서 거주했던 변희재와 방학 때는 오사카 집에서 머물렀던 윤정헌은 보안사의 시나리오에 따라 교토의 다방에서 접선한 것으로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윤정헌은 한번도 가보지 않은 북한을 방문한 것으로 공소장에 기재됐다.
- 신문 스크랩을 했다는 가위가 주요 증거품으로 제시되기도 했는데. 신문 기사를 오리기는 했나?
“그런 일이 한번도 없다. 우리말이 서툰데다가 의대 공부하기에 바빠서 당시에는 신문을 거의 읽지도 않았다. 그리고 일본에서 한국 신문을 다 볼 수 있는데 기사들을 오려뒀다가 몇달 뒤에 방학 때 만나서 건너줬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나.”
“이 사람이 잡혀가고 난 뒤 한달쯤 됐을 때 일본 시댁에서 전화가 왔다. 사람들이 찾아가면 남편 방을 보여주라고 했다. 그 뒤에 두어 사람이 와서 방에 들어가더니 문방 가위랑 카메라, 생화학 서적만 들고 갔다. 그게 남편을 간첩으로 모는 도구로 둔갑했다.”(유란)
- 대대적인 압수 수색을 하지도 않았단 말인가?
“그렇다. 그 세가지만 들고 갔다. 일본 집에도 사람을 보내서 <조선사>(암파서점)라는 책 한권만 달라고 해서 가져갔다. 일본에서 나온 한국 역사 책인데 남편의 형님이 사서 보던 거였다고 한다. 간첩 수사라면 가까운 친척 집까지 다 뒤진다던데 우리는 자기들이 필요한 것만 가져가고 일체의 수색이 없었다. 그걸 보고 친정아버지께서 ‘니 남편 절대로 간첩 아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면 힘들더라도 기다려라’고 하더라.”(유란)
- 검찰로 넘어가서는 사실대로 밝힐 수 있지 않았나?
“담당 검사가 최연희(78·15~18대 국회의원)였다. 그는 보안사에서 꾸민 조서를 대충 확인만 했다. 조서 내용이 다 사실이냐고 물었지만 바른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고병천 등이 검찰로 나를 넘기기 전에 ‘검사 앞에서 말을 뒤집으면 다시 데려와서 혼내겠다’고 협박해서 너무 무서웠다. 실제로 검사실에서 조사받을 때 나를 조사했던 보안사의 최홍상이 최연희 검사를 찾아와서 서류 봉투를 전달하고 가더라. 재판 받을 즈음에 합류한 홍성우 변호사가 걱정 말고 진실대로 다 말하라고 해서 그때부터 모든 게 거짓이라고 밝혔다.”
- 북한에 다녀왔다는 시나리오는 법정에서 완벽하게 깨지지 않았나?
“그렇다. 보안사에서 조사받을 때 하도 강요해서 교토대학 3학년(1975) 여름방학 때 북한을 갔다 왔다고 거짓 자백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하자는 대로 날짜를 다 맞추고 났더니 어느 날 조사실로 고병천이 혼자 들어와서는 ‘북한 갔다 온 거 진짜냐’고 묻더라. 아니라고 말하면 또 고문당할 게 뻔해서 그렇다고 했더니 그냥 나가더라. 그도 속으로는 미심쩍어했던 것 같다. 내가 방북 시나리오에 따라준 것은 나중에 법정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밝혀서 간첩 혐의를 벗어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실제로 재판할 때 변호사와 일본의 아버지께서 내가 북한에 갔다는 기간에 다녔던 교토의 자동차학원 졸업증명서와 서울에 다녀간 출입국 기록을 찾아냈다. 또 북한에 타고 갔다는 만경봉호의 출항 일자도 틀린 것을 확인했다. 그런데도 법원에서는 방북 부분만 제외하고는 조작된 간첩 혐의를 다 유죄로 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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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보안사의 전직 수사관 고병천씨의 위증죄 구형 공판이 끝난 뒤 그를 고소했던 윤정헌(왼쪽 둘째)씨가 장경욱(왼쪽 셋째), 이상희(맨 왼쪽) 변호사, 간첩 조작 피해자였던 박박(왼쪽 넷째)씨, 한국연구자인 기무라 다카시(맨 오른쪽) 규슈국제대학 교수와 함께 서울지방법원 앞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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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첩 조작’ 소문에도 “설마 그럴까 생각”
법정에서는 윤정헌이 변희재를 만났다는 교토의 다방(히가시이치조)과 관련된 사실도 엉터리인 것이 밝혀졌다. 히가시이치조(東一條)가 아니라 동국성(東國城)이었던 이 다방은 1983년 11월 폐업했다. 그런데도 보안사는 1983년 12월과 1984년 2월에 이곳에서 윤정헌이 변희재를 만나서 사상 교양과 공작금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주요 알리바이가 허위로 밝혀졌는데도 1심 재판부(재판장 이재훈, 판사 서명수·강일원)는 1985년 4월 징역 7년, 자격 정지 7년을 선고했다. 2심(재판장 오병선, 판사 김정남·양태종)과 3심(재판장 이정후, 판사 정태균·신정철·김형기)도 1심대로 형을 내렸다.
윤정헌은 1953년 일본 오사카에서 3남2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초·중·고 모두 일본 학교에 다녔다. 대학(교토대학 축산학과)에 입학하면서 “한국인이라는 자각이 생긴 고교 때부터 사용하고 싶었던” 본명인 한국 이름을 적었다. 한국 문화와 말을 배우려고 학내 서클인 조선문화연구회(조문연)에 가입했다. 남한과 가까운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이하 민단) 계통인 한국문화연구회(한문연)도 있었지만, 한문연은 생긴 지 얼마 안 돼 회원도 적고 사무실도 없었다. 그래서 조문연에 민단과 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 상관없이 많은 동포 학생들이 가입했다. 하지만 그는 2학년 때 조문연을 탈퇴하고는 더 활동하지 않았다. 총련에 비판적인 작가 김석범을 초청해 강연회를 열었다가 선배들로부터 싫은 소리를 듣고는 자신과 맞지 않다고 생각해서였다. 대학 졸업 뒤 도쿠시마현에 있는 한 제약회사에 취직했으나, ‘승진의 벽’ 등 일본 사회의 차별에 부딪쳤다. 사업차 한국에 자주 드나드는 아버지의 권유도 마침 있고 해서 윤정헌은 의사 꿈을 안고 1979년 서울로 유학길에 나섰다.
- 1970년대에도 재일동포 유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간첩 조작 사건이 여러 건 있었다. 유학 올 때 그런 두려움은 없었나?
“재일동포 간첩 사건이 날 때마다 사람들이 조작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기는 했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뭔가 문제될 일이 있으니까 사건이 됐지 전혀 잘못이 없는데 그랬겠는가’라고 생각했다. 한국에 가더라도 말조심하면서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더구나 아버지는 줄곧 민단에서 활동을 했고, 대구 출신의 어머니는 박정희와 전두환을 무조건 지지했다. 그런 내가 간첩으로 몰릴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윤정헌은 서울올림픽을 앞둔 1988년 6월 특사로 풀려났다. 복학을 추진했지만, 학교와 문교부(교육부의 옛 이름)가 서로 책임을 미뤘다. 오사카의 부친이 “거기 있다가 또 무슨 봉변을 당할지 모르니 그만 돌아오라”고 해서 부인과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갔다. “먹고살기 위해서” 부동산 회사와 도시계획 컨설팅 회사 등에 취직했다. 컨설팅 회사에서 한국 영업담당으로 일할 때인 1990년대 후반에 한국에 출장을 가야 할 일이 생겼다. “사건 이후 처음 한국에 오는데 공항에서 누가 얘기 좀 하자고 나타나지 않을까 마음을 졸였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선 뒤에야 출입국 때 그런 두려움이 사라졌다.”
항일독립운동과 과거 독재정권 시절의 반민주적 또는 반인권적 행위를 조사하기 위한 진실화해위원회가 2005년 12월에 출범했다. 정말로 진상 규명이 될까 하는 의구심에서 주저하던 윤정헌은 마감 시한이 임박한 2006년 11월에야 주변의 권유로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신청서를 작성했다. 2009년 진실화해위원회는 마침내 ‘윤정헌 사건’에 대해 “43일간 불법 구금한 상태에서 고문, 가혹행위를 통하여 범죄 사실을 조작하고 검찰에 송치하여 신청인을 간첩죄 등으로 처벌받도록 한 비인도적, 반인권적 인권 침해 사건임이 규명됐다”고 결론내렸다. 그는 이를 근거로 2010년 1월 서울지법에 재심을 신청했으며, 이듬해 1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고문한 자들, 꿈에 정기적 등장”
- 진실화해위원회 조사(2008년)를 받을 때 바닥에 죽 늘어놓은 보안사 수사관들의 사진을 보고는 고병천과 이덕룡, 최홍상 등 고문 당사자들을 정확하게 지목했다. 고문 등 가혹행위 때 누가 어떤 일을 했는지도 진술했다. 무려 24년이란 세월이 흘렀는데 어떻게 그들의 얼굴을 기억했나?
“보안사에서 나오는 마지막 날 조서를 보고 수사관 이름을 기억해뒀다. 김병진씨의 <보안사> 책에 묘사된 인상 착의와도 똑같았다. 수십년 동안 그들의 얼굴을 잊고 싶어도 잊을 수 없었던 것은 1년에 몇 번씩 정기적으로 꿈속에 그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 긴 싸움이 다 끝나가는데 요즈음 심경은 어떤가?
“고병천 그 사람이 집행유예 없는 유죄 판결을 받더라도 속이 안 시원할 것 같다. 똑같이 나쁜 짓을 했던 수십, 수백명의 다른 수사관들은 훈장 받고 연금 받으면서 버젓이 잘 살고 있지 않나. 고병천만 속으로 재수없게 걸렸다고 생각할 거다. 없애버려야 하는 보안사 조직도 그대로 있다.”
- 고병천을 위증죄로 고소했던 것은 복수를 하고 싶어서였나?
“그건 결코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재심 무죄로 다 끝내고 싶었지만, 내 사건을 겪으면서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다. 보면 알겠지만 너무나 시시한 내용으로 나를 간첩으로 만들었지 않나. 누가 봐도 죄가 아닌 것을 뻔히 알 수 있는데도 기소하고, 유죄 판결을 내린 검사와 판사가 너무 밉더라. 수사관보다 더 밉다. 법정에서 고문받았다고 말해도 들은 체도 않더라. 모두 다 서울대 법대 등을 나온 우수한 사람들인데 보안사의 조작을 그대로 추인했으니 그들도 공범이다. 똑같이 벌을 받아야 하는데, 국회의원으로 출세하고, 변호사로 잘만 산다. 이래서는 안 되지 않나. 비록 일개 수사관에 대한 작은 처벌이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가혹행위를 저지르면 끝내 벌을 받는다는 작은 교훈이라도 됐으면 좋겠다. 또 고문 등 반인도적 범죄에 대해서는 공소시효를 없애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지난달 30일 고병천에 대한 결심 공판이 끝난 뒤 ‘작은 승리’를 예감한 듯 윤정헌의 얼굴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5월은 일이 많지만, 28일 선고 때는 가능한 한 참석하려고 한다. 끝을 보고 싶다.” 인근 식당으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조금은 가벼워 보였다.
도쿄/김종철 선임기자
phill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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