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9.08.06 04:59
수정 : 2019.10.09 13:34
【우리 아이 마음 키우기】
초등 3학년 이상 아이들이 읽으면 푹 빠지는 책이 있다. <윔피 키드>(Wimpy Kid)다. 어깨가 꾸부정한, 소심하고 줏대 없어 보이는 주인공 그레그 헤플리가 등장한다. 일기 형식의 이야기와 사건들은 아이들이 자신을 그레그와 동일시하기에 안성맞춤이다. 49개국에서 1억8천만부 이상 판매됐으니 전 세계 어린이가 사랑한 책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몇 해 전 <윔피 키드>의 저자 제프 키니가 학교를 방문했다. 강연 뒤 사인도 해 준다는 말에 아이들은 한 달 전부터 책을 사서 기다렸다. 책에 사인받고 싶다고 잠을 설친 아이들 얼굴에 다크 서클이 생길 정도였다.
교사들은 걱정이 생겼다. 강연 마치고 아이들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있었다. 통역사는 있지만, 그래도 아이들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질문할지 미지수였다. 떠들고 놀기 좋아하는 아이들, 막상 멍석 깔아주면 눈치만 보지 않을까 하는 염려였다. 몇몇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모범 질문을 만들어 주기까지 했다.
제프 키니의 강연 날. 그렇게 떠들던 아이들이 신기할 정도로 조용히 경청했다. 윔피 키드의 위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저자의 어릴 적 이야기, 어떻게 만화 작가가 됐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주인공 그레그가 탄생했는지, 아이들을 충분히 매료시킬 만한 내용이었다. 드디어 강연을 마치고 질문의 시간이 다가왔다. 질문하고 싶은 아이들은 마이크가 있는 무대 위로 올라오라 했다.
순간 교사들은 긴장했다. 세계적인 작가가 한국에, 그것도 우리 학교에 왔는데 아이들 몇이나 질문할 수 있을까 하는 염려였다. 하지만 막상 벌어진 상황에 교사들은 정말 긴장해야 했다. 무대로 올라오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이 벌떼처럼 몰려들었다. 너무 많은 아이가 질문을 하겠다고 올라오는 통에 몇 명은 돌려보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통역이 있었지만 아이들은 제프 키니와 직접 대화하기를 원했다.
며칠 동안 준비했는지 유창하게 영어로 질문했고, 제프 키니의 답을 직접 들었다. 늘 뭔가 챙겨주어야 할 것 같았던 아이들이 이토록 주체적으로 세계적 작가와 대면한다는 게 대견했다. 교사들만 쫄아 있었을 뿐 아이들은 당당했다. 선생님들이 알려준 모범 질문은 없었다. 정말 아이들이 궁금한 것들을 물어보았다. 그 가운데 한 질문이 기억난다. 당시 4학년 남학생이었다. 마이크를 들고 잠시 침을 삼켰다. 혹시 영어를 못해서 그러나 싶어 사회자가 “통역이 있으니 한국말로 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그 아이는 거침없이 영어로 말했다.
“왓 이즈 유어 폰 넘버!”
당신과 친구 먹고 카톡도 하고 싶으니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메시지였다. 제프 키니는 순간 당황했다. 전 세계 많은 나라를 방문하고 강연한 뒤 질문을 들었지만, 이토록 당돌하게 전화번호를 알려달라는 아이는 한국이 처음이었다.
많은 양육자들이 아이의 자존감을 걱정한다. 주눅 들어 위축될까 염려한다. 교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정작 권위 앞에 작아지는 건 어른들뿐, 우리 아이들은 대부분 당당하다. 그럴 기회를 주지 않았을 뿐, 대한민국 아이들은 언제든 전화번호를 ‘딸’ 준비가 되어 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우리 학교에 왔으면 좋겠다. 트럼프는 개인 전화번호를 알려줄 준비가 되어 있을지 궁금하다. 우리 아이들을 만나려면 긴장하고 오기 바란다. 우리 아이들은 생각보다 당당하다.
김선호 서울 유석초 교사, <초등 자존감의 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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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호 서울 유석초등학교 교사, <초등 자존감의 힘>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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