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 한국마사회 비리 알리고 숨진 경마기수 문중원씨 부인 오은주씨,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이사장을 만나다
“남편 분향소 제단에 빵 올려두면 매일 까치가 찾아와” 오은주씨 슬픔에
“두 자식 예쁠 때인데 얼마나 한이 맺힐까” 공명한 김미숙 이사장
투사가 된 두 사람
김미숙 “한해 2400명 산재로 숨져…사고 이전엔 어둠의 세상 몰라”
오은주 “어두운 세상에 살며 우릴 지켜줬던 남편…이제 자식들 미래 위해 내가 움직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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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일 오후 서울정부청사 고 문중원 기수 시민분향소에서 고 김용균 어머니 김미숙(오른쪽)씨와 고 문중원씨 부인 오은주씨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김봉규 선임기자 bong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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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 (52) 김용균재단 이사장과 오은주 (37)씨가 살아온 궤적은 다르다 . 비정규직 노동자로 살아온 김 이사장이 2018년 12월 태안화력발전소 하청노동자였던 아들 김용균을 잃고 절망하는 모습을 뉴스에서 봤을 때 오씨는 두 아이를 돌보는 평범한 주부였다 . 지난해 11월 29일 남편 문중원 기수가 세상을 떠난 뒤 모든 것이 달라졌다 . 지난 15일 <한겨레 >의 주선으로 정부서울청사 앞 문중원 기수 시민분향소에서 만난 김 이사장과 오씨는 오랜 지인처럼 이야기를 나눴다 . 그들 영혼에 새겨진 고통의 무늬는 데칼코마니처럼 겹쳤다 . 두 시간 넘게 이어진 그들의 대화를 요약해 정리했다 .
-조금 전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이야기를 나눴나요.
김미숙(이하 김) “꿈 얘기를 나눴어요. 맨날 잘 때마다 어떤 모습이든 네가 원하는 말을 꿈에 나타나서 해주길 바라게 되니까요. 용균이는 4~5번 정도 나타났어요. 다 어릴 때 유치원 이전 모습으로 많이 나타났어요.”
오은주(이하 오) “한번도 남편 꿈을 못 꿨어요. 오히려 꿈 꾸면 좋지 않다는 얘기는 듣기는 들었는데 너무 보고 싶죠. 맨날 자기 전에 한번만 나타나 달라고. 한번만 목소리 들려달라고 빌고 자요. 꿈에 안 나오면 들을 수도 볼 수도 없잖아요.”
-오은주씨는 고 문중원 기수 시민분향소에 빵을 매일 올린다고 하던데요.
오 “기수는 체중 관리가 정말 중요해요. 살찌는 밀가루 음식을 먹으면 안 되는데 밥 대신 빵 먹을 정도로 좋아했어요. 매일 새벽 4시40분 즈음 일어나서 혼자 빵 먹었어요. 자기는 빨리 일어나는 이유가 빵 먹고 출근하기 위해서래요. 어제도 빵 올려놓았는데 자꾸 까치 한마리가 와서 먹어요. 오늘도 걔가 와서 그 위에서 맴도는 거예요.”
김 “까치가 신랑이 아닐까 생각이 들겠네요.”
오 “네. 그런 생각에….”
김 “그냥 먹게 두고 싶은 생각이 들죠?”
오 “까치를 보는데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새잖아요.”
김 “저도 1년이 지났지만 똑같아요.”
-처음 주검을 접했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김 “영안실 서랍장 같은 데에서 댕겨서 꺼내는데 머리부터 나오더라고요. 애가 여드름이 많이 나는 편이라서 저도 세수하고 얼굴 못 건들게 했든요. 그래서 손등으로 만지곤 했어요. 평상시처럼 손등으로 만지는데 말랑말랑한 게 살아있는 사람 피부 같았어요. 달라진 게 차가워진 피부 하나. 그것만 다르더라고요.”
오 “저도 정말 서랍장 같은 데에서 사람을 꺼내더라고요. 죽었다고 했는데….”
김 “금방 일어날 거 같죠?”
오 “죽었다고 했는데 눈 뜨고 있는 거예요.”
김 “얼마나 한이 컸으면…. 두 자식들 얼마나 예쁠 때에요. 아내랑도 한창 좋을 때잖아요. 그 가족을 두고 죽을 결심을 했다는 건 정말 엄청나게 고통이 컸을 거라고 생각해요. 얼마나 한이 맺혔으면 눈도 못 감고….”
오 “진짜 눈을 이렇게 뜨고 어떻게 죽었냐면 손을 꽉 쥐고 가슴에 있는데 정말 많은 게 느껴졌어요.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혔으면 주먹을 꽉 쥐고 죽었을까 싶고. 마음은 어떻게든 살고 싶었을 건데 현실은 그게 못 되니까요. 저도 얼굴을 만지는데 살아있는 거 같았어요. 단지 차가웠을 뿐이고요. 귀는 평소보다 더 말랑말랑했어요. 다 듣고 있을 거 같아서 정말 말을 많이 했어요. 오빠 일어나, 이렇게 하면 안 된다고, 어제 집에서 밥 맛있게 먹고 잠깐 나갔는데 이건 거짓말이니까 빨리 일어나라고. 부르면 일어날 거 같았어요.”
-각각 죽음에 공기업이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심정이 어땠나요?
김 “사고 난 다음날이죠. 빈소 현관에서 사측 처음 만났는데 두 명 나왔어요. 죄송합니다 하면서 ‘근데 용균이는 가지 말라는 곳을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하고 참 착하게 성실하게 하는데 그래서 용균이가 그렇게 일해서 죽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또 ‘고집이 세다’는 말을 했어요. 고집이 세서 가지 말라는 곳을 가서 하지 말라는 일을 했다고 얘기를 했어요. 10분 지나니까 의문이 드는 거예요. 사쪽이 유가족 만났을 ? 이런 말을 해도 되나. 용균이 동료들 데려가서 이럴 때 어떻게 처리하냐고 그러니까 무조건 가서 일을 하도록 지시내린다고 얘기하는 거예요. 아, 이건 용균이한테 누명 씌우는 거구나. 책임 전가하고 있구나, 라는 걸 알아서 내가 할 일은 용균이 누명은 벗겨줘야 하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오 “투쟁은 전혀 생각도 못했죠. 저도 한국마사회가 거대한 회사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전에 이미 6명의 기수나 마필관리사가 죽어나가도 정말 끄떡없는 곳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감히 유가족이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선뜻 들지 못했어요. 어떻게 해야 하지 하는 찰나에 장례식장에서 정신이 든 게 공공운수노조가 하는 말 듣다보니 우리 신랑 진상규명을 위해 함께 해주실 건가 보다 느꼈어요. 이틀 뒤에 부산 경마장에 다같이 갔어요. 우리 신랑 유서에 나온 이름 실명이 거론된 사람이 있어요. 충격 받은 게 (김미숙 이사장의 경우) 누명을 씌우려고 한 사과이긴 하지만 (사쪽의) 사과는 받았잖아요. (사과 장면을) 눈으로 보시기도 하고. 저는 철로 다 감아서 문을 잠가놓은 거예요.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게.”
김 “빈소에 있을 때 (마사회가) 안 왔어요?”
오 “아무도 안 왔어요. 지금도 온 사람 없어요. 철문 잠근 걸 보니 ‘이게 지금 뭐하자는 거지 이 사람들이?’ 싶었어요. 그냥 문을 잠군 게 아니고 철 사슬로 돌려 막았어요. 아무리 그래도 지금 여기서 사람이 죽었는데 사람이 죽었으면 진상은 ‘당장 못 밝혀도 노력하겠습니다’라는 말이라도 해야 되잖아요, 딱 보는 순간 아, 이거 정말 이 사람들 대단한데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싶은 거예요. 두번째 또 느낀 게 저희 신랑이 경마하는 날에 세상을 떠났어요. 나름 부산에서 애도를 표한다고 모든 경주를 취소했어요.
근데 부산이든 서울이든 동절기 휴가가 있고 하절기 휴가가 있어요. 마사회가 경주 못했으니 다음주에 ‘보전 경주’하자고 시행한 거예요. 감히 우린 지금 장례도 안 치르고 사과 한 마디도 없이 뭘 한다고? 보전 경주를 한다고? 확인하는 순간 돈에 혈안이 된 악마 같은 그 사람들을 다시 만나러 가야겠다고 갔어요. 왜 장례도 치르지 않았는데 휴장기에 해야 되느냐고 따지니까 ‘취소 권한이 없다. 서울 본관에 가셔야 한다’는 말만 하며 무책임하게 행동하는 거예요.
부산 쪽이 책임 없다고 말해서 지난해 12월21일 서울로 갔어요. 김낙순 마사회장 만나러 갔는데 과천 마사회 본관 앞 백명 가까운 경찰이 서서 그 누구도 못 들어가게 막은 거예요. 경찰 앞에서 들어가야 된다고 하니까 팔꿈치로 밀기 시작하는 거예요. 밀어서 바닥에 쓰러졌어요. 바닥에 쓰러지니까 오기로 다리 사이로라도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들어가니 발길질이 쏟아졌죠. 경찰들이 팔을 못 쓰니까 발로 차는데 머리 어깨 다 맞았어요. 손 다 밟히고…. 뒷줄 경찰은 절 보고 발로 차더니 숙이면서 머리 잡더니 가라고 말하더라고요. 관등성명 뭐냐고 계속 물으니 다른 경찰들이 팔 사이로 목 집어넣어서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저희 아버지가 뒤에서 잡고 있었는데 그걸 보고 ‘목 조르지마’ 소리를 너댓번 질렀어요. 그러고나서 풀려났고요. 그때 ‘나 정말 끝까지 싸운다’, ‘이 억울함 풀지 못하면 장례 못 치른다’. 그때 정말 확고하게 다짐을 했었던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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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한국마사회의 승부조작 등 비리 행태를 고발하고 숨진 경마 기수 문중원씨의 49재가 16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열렸다. 49재를 마친 유가족과 시민대책위 관계자들은 고인의 죽음에 대한 한국마사회의 공식 사과와 진상규명 등을 요구하며 청와대 방면으로 행진했다. 문 씨의 아내 오은주 씨가 행진 도중 눈물을 흘리고 있다. 강창광 선임기자 ch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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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투사라고 불리시는데 동의하세요?
김 “국민 세금 받는 사람들이 국민 상대로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일을 해도 되나. 기자들이나 여기저기 알릴 수 있는 데는 다 알리고 싶었어요. 힘없는 국민이 모여야지 바뀔 수 있다는 걸 알게 됐고요. 그러면서 대통령하고 협상이 이뤄져야 원만한 협상이 나오겠구나 알게 됐고요.
고용노동부도 4번인가 찾아갔는데 한 명은 다리 꼬고 비스듬히 누워서 말하는 거예요. 유가족이 우스운 거죠. 마지막에 당신네들이 이렇게 나오니까 대통령과 말할 수밖에 없겠다고 말하니까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를 풀고 다른 한 명은 고개랑 허리를 푹 숙이더라고요. 이 사람들은 위에서 시키니까 하는 사람들이라는 걸 알게 됐어요. 제가 답이 딱 나온 게 정말 대통령이 앞장서고 기재부나 산자부 고용노동부 우두머리들이 모여서 회의해야 결론이 나올 수 있겠다는 걸 알게 됐죠. 다음 광화문 집회 때 용균이가 ‘문재인 대통령, 비정규직 노동자와 만납시다’ 피켓 들었듯이 대통령과 할 말 있다고 말한 거죠.”
오 “전 처음부터 싸우려고 했어요. 왜냐면 벌써 저희 남편 포함 7명이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는데 솔직히 다들 잘 몰랐잖아요. 다 잊혀졌어요. 제가 싸워서 내 신랑 죽음을 알리고 동시에 그 전에 죽었던 6명 죽음도 같이 알리고 싶었어요. 남편 죽음이 마지막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며칠 전에 청년 단체를 만났어요. 만났는데 그분들 말씀하시는 게 청년들의 꿈의 직장 1위가 공기업인 거예요. 그걸 듣는 순간, 우리 남편만을 위해 싸우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청년의 미래고 곧 자식의 미래라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공기업이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요. 제가 혼자 나선다고 공기업이 손바닥 뒤집어듯이 한번에 뒤집어질 거라는 생각은 안하지만 어느 정도 제가 조금은 뒤집어 놓아야지 그 사람들이 죽지 않고 일할 수 있고 고통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 거예요.
며칠 전에는 기수 몇명이 부산에서 올라왔어요. 남편은 14~15년차 기수지만 그 기수들은 4년밖에 안 된 기수들이었어요. 제가 그랬어요. 제가 싸우는 이유는 더 이상 경마장에 이렇게 문중원 선배님 같은 사람들이 나오지 않기 위해서 싸우는 거다. 제가 환경을 잘 만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건데 조금은 뒤집어 놓을 테니 대신 조금 더 목소리 내고 힘을 내서 손바닥을 완전히 뒤집는 건 기수들의 몫이라고 얘기해줬어요. 고개를 끄덕하더라고요.
그분들은 10년 일할 수 있는 곳이잖아요. 여기서 내 남편 못 살아오는데 그냥 있으면 어제 온 기수들, 그중에 한 명이 죽을 수 있다는 생각도 들더라고요. 제 남편의 진상 규명도 되게 중요하지만 더 목표가 많아진 거죠.”
-싸우다보면 벽을 마주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나요?
김 “기득권의 벽이죠. 보이는 괴물은 어떻게 하겠는데 보이지 않는 괴물은 방어를 못하는 거잖아요. 보이지 않는 괴물이 기득권 세력이라는 거죠. 지금 용균이 관련해서도 합의하고 이행된 게 없잖아요. 권고안 나왔는데 정부가 최대한 반영하겠다고 얘기했지만 앞에서만 말하고 뒤에서 안 하고 있잖아요.”
오 “저희는 계속 마사회 관계자 면담 요청 계속했는데도 불구하고 만나지는 못했어요. 결국 정부가 나서주기를 바래서 마음 아프지만 남편을 길거리에 두고 있어요. 냉동 온도를 맞추기 위해서 드라이아이스를 교체해 가면서 그 상태로 지금 길바닥에 세워놓았죠. 그러면 조금 더 알아줄 줄 알았거든요.”
김 “맞아요. 우리가 그렇게 하는 건 빨리 합의 이끌어내는 수단인데 벌써 기간이 좀 지났잖아요. 저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위에서 아예 안 봐줄 것 같으니까요.”
오 “(문중원씨 주검을 갖고 서울에 온지) 20일이 지났는데도 정부는 말이 없어요. 매일매일 보이지 않는 벽이에요. 저희는 어떻게든 알리려고 하고 있죠. 6일부터 헛상여를 만들어 청와대 앞까지 매일 행진하고 밤마다 촛불문화제하면서 눈물 흘리고 하는데도 마음대로 진전 안 되는 거 같고 바로 청와대 앞에 있는데 이렇게 외면할 수 있나. 이렇게 모를 수 있나. 이렇게 안 들릴 수 있나.”
김 “(대통령에게) 매일 보고는 들어간다고 하더라고요. 싸움이 되려면 국민 호응이 있어야 돼요. 부조리들을 바꾸는 건 역시 국민이 모여서 할 수 밖에 없다는 걸 보여줘야 돼요. 저는 그 난리 쳤는데도 서울 올라와 한달이 지나서야 합의가 났거든요. 문 열사는 조금 더 많은 사람 모여야 나라에서 더 빨리 해결하려고 노력할 거 같아요. 국민들 호흡해주는 게 정말 힘이 되거든요.”
오 “그런데 꼭 그래야만 정부가 입을 여나 싶은 거예요.”
김 “꼭 그래야만 해요. 왜냐면 정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은 하나도 안 무서워해요. 여론을 무서워하고 국민들을 무서워해요. 지지자 없어지는 게 가장 중요하고요. 정말 이 사건을 해결하지 않으면 국민이 많이 돌아서겠구나를 정부에 보여줘야 움직여요.”
-문재인 대통령한테 매일 인스타그램 메시지를 보낸다고 들었어요.
오 “지난해 12월31일부터 오늘까지도 매일 보내고 있어요. 근데 그것조차도 직접 안 들어갈 거 알아요.”
김 “인스타그램이 뭐에요?”
오 “
에스엔에스(SNS)인데 문재인 대통령 계정이 있더라고요. 밑의 분들이 올리고 관리하는 거 알지만 문중원 기수라는 그 말 한마디만 귀에 들어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싸우면서 가장 힘들거나 두렵거나 절망스러운 게 무엇인가요.
김 “저도 싸우면서 합의가 안 되는 게 되게 답답했어요. 자꾸 시간은 지나고 주검은 그냥 냉동고에 있는 상태고. 제일 마음에 걸리는 게 주검이잖아요. 2017년 마사회에서 돌아가신 분 부모님은 1년까지 생각하고 싸웠다고 들었어요.”
오 “네. 마필관리사 박경근씨 장례 치르기까지 84일 걸렸어요.”
김 “언제라도 될 거라고 생각하고 싸웠어요. 용균이가 2018년 12월에 그렇게 됐는데 크리스마스에 설에 문중원씨랑 비슷한 시기에요. 여긴 올해 또 총선까지 겹쳐 있잖아요. 자꾸 묻힐까봐 되게 두려운 거예요.”
오 “전 서울에 온 뒤 인터뷰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닌 거예요. 벌써 50일이 가까워지는데도 모르는 사람이 너무나도 많고요. 모르는 만큼 정부는 더 관심 없을 거고요. 사람들이 많이 알아야 정부가 무서워서 나설 텐데 그렇지 못하니까 언론이 조금 더 와서 해주면 좋겠는데 마음 같이 안 되더라고요. 다행히도 민주노총에서 저희 신랑을 받아안고 열사대책위를 구성해 28일 결의대회를 여는 등 조금 더 규모가 커지긴 하는 거잖아요. 그런데 저는 김 이사장님처럼 언젠가는 끝나니까 끝날 때까지 싸우겠다는 마음을 못 가지겠어요. 저를 기다리는 애들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계속 애들을 기다리게 할 수가 없어서(울음).”
김 “저는 아무도 없으니까 이렇게 하는데 여기는 자식이 둘이나 있잖아요. 상상을 못하는 거죠.”
오 “그래서 더 빨리 끝나면 좋겠는데 안 되니까 더 답답해요.”
-지칠 때 이사장님은 고 김용균씨가 든 팻말 사진을 보면서 힘을 얻었다고 들었는데요. 오은주씨는 어떤 걸 보면서 힘을 얻나요.
오 “여기에 와서 투쟁을 하면서 만나는 분들께 힘을 얻죠. 사실 그분들도 저를 처음 뵙고 저희 남편에 대해서 모르시던 분인데 이 모든 일들을 다 확인하시고 정말 손 다 잡아주시고 다 안고 같이 눈물 흘러주시고 힘내라 그 한마디가 정말 막 이게 심장이 차가워졌던 심장이 엄청 따뜻해져요. 근데도 너무 쏟아져요 눈물이. 우리 신랑 잃은 마음에 너무 슬펐던 마음이 고마운 눈물로 바뀌어요. 들고 있는 촛불처럼 다 따뜻한 마음만 계세요.
어떤 분은 저 보시더니 목도리 없다고 목도리 사주시고 목티 두 개 사주셨어요. 그런 거 보면서 따뜻한 마음들이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남편은 없지만 남편이 이 사람들을 만나게 해준 거 같아서 고맙기까지 해요.”
-‘그날’ 전후로 사회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을 것 같아요.
김 “이전에는 정말 이런 어둠의 세상이 있는지 몰랐어요. 1년에 2400명이 안전하지 않아서 죽을 거라고는 일반인은 상상을 못해요. 국가가 방치해서 사람들을 죽이는 걸 아예 모르니까 고민도 없어요. 갑자기 일 당해서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니까 우리나라가 엉망인 게 보이고 이런 일이 수십년간 이어왔다는 게 너무 충격적이죠. 모르는 사람들이 막을 수 없는 거잖아요. 알고 있는 사람들이 할 수밖에 없잖아요. 모르는 사람이 죄 지은 건 아니니까요. 사고 이전에는 저도 모르고 살았고요. 그렇게 생각하면 저도 죄인인 거죠.”
오 “어두웠던 세상에 남편은 살고 있던 것 같아요. 남편은 어두운 세상에 우리 가족이 살지 않게끔 되게 예쁘고 밝은 공간에서 지켜줬어요. 우리는 그 지킴 속에 화목하게 살고 있었는데 남편이 그렇게 되고 제가 세상에 나와서 보니까 우리나라에 그렇게 많은 해고자와 비정규직,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많은 거예요. 내 자식마저도 어두움 밖에 없는 세상에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내가 움직여야 바뀌겠다 싶더라고요.”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고 김용균씨에게 조금이라도 할말이 생겼다고 예전 언론 인터뷰에서 김 이사장님이 말했었잖아요. 오은주씨는 어떤 순간에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김 “통과될 때는 그럴 줄 알았지. 그렇게 인터뷰에서 말한 뒤 태안에 있는 빈소에 갔더니 동료들이 다 술먹고 널브러져 풀죽어있더라고요. 환호할 줄 알았는데 그 법에 우리가 안 들어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고개를 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하위 법령이 다 소실되고 난 뒤에 그냥 내가 무슨 짓을 했나, 뭘하고 왔는지 되게 답답했어요.”
오 “남편이 조교사 심사 뒤 마방 받는 과정에서 채용비리 때문에 되게 힘들어했어요. 채점표를 공개해달라고 마사회에 얘기했더니 개인정보라서 공개할 수 없다 했는데 그걸 찾아냈어요. 외부인사 2명, 내부인사 4명이 심사했는데 채점표를 보니까 외부인사들은 다 합격점을 줬는데 내부인사만 점수를 낮게 줬더라고요. 누굴 합격시킬지 내부인사들은 정해놓았으니까요. 오늘(15일) 대검찰청에 가서 고발하고 왔는데 남편이 억울해했기 때문에 조금 억울함을 풀어줬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것만이라도 오늘 조금 세상에 알리고 밝힌 거 같아서 남편이 기자회견을 보고 있었다면, ‘거봐 내가 맞잖아. 외부인사들 모르는 사람들은 날 인정해줬잖아’ 생각할 거 같은 마음이 들었어요.”
-가끔 감성팔이하지 마라는 반응도 나오던데 보면 어떤 생각이 드세요?
오 “사람들이 댓글 보지 말라고 하는데 사람인지라 보게 돼요. 악플 본다고 주저앉지는 않아요. 저도 그렇게 노조를 좋아했던 사람은 아니였어요. 기사보고 또 왜 저러나 이런 사람이었는데 와서 보니까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였구나 라는 걸 알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악플다는 사람들도 그전 제 모습 같은 거예요. 실체를 잘 모르니까요. 감성팔이로 보일 수 있지만 별로 연연해하지 않아요. 댓글 하나로 우리 무너질 사람들 아니잖아요. 그럼 시작도 안 했죠.”
-현재 가장 바라는 게 무엇일까요?
김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영국처럼 만들어서 전체 산업이 안전해졌으면 좋겠어요.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등 제대로 된 법을 도입해서 제재할 수 있는 법안이 서서 이거 안 지키면 큰 불이익 당한다는 걸 보여주면 좋겠죠.”
오 “남편이 억울하게 죽었으니까 지금은 눈 감고 있어도 마음 속으로는 눈뜨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 억울함이 풀려서 편하게 스스로 눈 감을 수 있으면 좋겠고 꽉 쥐고 있는 주먹 풀리면 좋겠어요. 합의가 잘 돼서 꼭 이행되면 좋겠고요. 2년 전 죽었던 마필관리사 두분과 마사회가 했던 합의가 하나도 이행되지 않았어요. 이행되지 않아서 또 하나의 죽음이 나왔죠. 그게 제 남편이 됐고요. 이번에도 이행이 되지 않으면 2년이든 1년이든 최소 몇 개월 안에 또 죽어요. 그만 죽어야죠. 그리고 전 아이들에게 가고 싶습니다. ”
전광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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