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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3.13 19:15 수정 : 2006.03.13 19:25

미국으로 입양시킨 자녀들을 생각하며 20여년 동안 눈물지어 온 박은주씨가 13일 입원중인 평택의 병원 병실에서 아이들의 미국 입양을 주선했던 가톨릭교회 신부의 명함을 보고 있다.

기지촌 출신 박은주 할머니가 안정리를 지키는 이유
자식들 기다림에 마르지 않는 눈물

“솔직히 안 와도 좋아. 살아 있다는 소식이라도 알았으면….”

1970∼80년대 대전시와 경기 평택 안정리 미군기지 캠프 험프리스(K-6) 주변 기지촌에서 웨이트리스 생활을 한 박은주(63· 사진)씨는 13일 자신의 수첩에 20여년 동안 고이 간직해온 명함 한장을 꺼냈다. 1984년 10살 된 딸 엔젤라와 9살 된 아들 차닝의 미국 입양을 주선했던 한 가톨릭 신부의 것이었다. 이 명함은 20여년 전 ‘가기 싫다’고 울며 한국 땅을 떠난 아이들과 박씨를 이어왔던 유일한 ‘끈’이다.

엔젤라는 당시 초등학교 2학년, 차닝은 초등학교 1학년이었다. 생계 때문에 20대에 기지촌에 들어와 만난 미군 백인 헌병과 결혼식도 못 올리고 낳은 아이들이었다. 그 미군 병사는 1974년 ‘6개월 뒤 장교 시험을 보고 나서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평택을 떴다. 박씨가 둘째아이를 갖고 임신 3개월째에 접어들던 때였다.

돌아온다던 미군 아빠는 오지 않고
‘튀기’라는 놀림 못이겨 20년 전 남매 미국 입양 생이별
“커서 찾으러 온단 말에 차마 못떠나 이젠 생사만이라도 알았으면”

그러나 어린 딸의 목에 군번줄을 걸어주며 다시 온다던 미군 병사는 돌아오지 않았다. 박씨는 일하던 클럽 입구에서 엄마를 기다려줄 만큼 쑥쑥 크는 아이들 모습에 고생도 잊었다.

그러나 ‘튀기’(혼혈아)라며 놀리는 주변 냉소까지 견디기는 어려웠다고 했다. “하루는 아들애가 학교에서 친구들이 ‘헬로 헬로’ 하면서 ‘네 고추 얼마나 큰가 보자’며 놀리니까 바지에다 오줌을 싸버린 거야. 집에 오면서 바지는 꽁꽁 얼었고….” 박씨는 “애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는 ‘혼혈’은 커서 군대도 못 갔어. 군대 못 가면 직장도 못 얻고…”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국외입양을 결심했지만 정작 떨어지기 싫어하는 아이들을 설득하기는 어려웠다. 박씨는 “우린 헤어지는 게 아니야. 너희들은 공부하러 가는 거야. 미국 가면 ‘헬로’ 하며 놀리는 애들도 없어”라며 아이들을 달랬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미군이 돼 한국에 와서 방송사에 엄마 찾는다고 하면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했다. 입양되기 전 3개월 동안 세모자는 밤이면 잊지 않도록 엄마의 한글 이름을 흰 종이에 옮겨 적었다고 한다.

미국 미주리주로 떠나던 날, 딸은 공항에서 “엄마 안정리 떠나지 마. 내가 찾으러 올테니까 죽지 마. 아프지 말고…”라고 말했다고 한다. 당시 박씨는 미국의 엔비시 방송사에서 아이들과 자신을 촬영했다고 기억했다.

아이들을 보내고 20여년, 언젠가는 아이들이 올 것이라며 안정리를 지켜온 박씨는 “가방을 멘 아이들만 보면 눈물이 너무 나고 기가 막히더라구. 그때마다 빈속에 술을 왕창 마시고 살았지”라고 말했다. 그는 지금 천식에 위궤양을 앓고 있다. 그런 그가 얼마 전 대한사회복지회를 통해 알아낸 아이들의 미국 주소지로 편지를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박씨는 “공항에서 울면 아이들이 비행기를 타지 않을 것같아 울지 않았어… 그런데 그때 애들이 지독한 ‘울 엄마’가 우리를 버렸는가 보다며 찾지 않는 것 같다”고 눈물 지었다. 그는 “죽기 전에 아이들 소식이라도 들으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말했다.

평택/글·사진 홍용덕 기자 ydh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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