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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6.20 16:35 수정 : 2006.06.21 15:15

2050 여성살이 /

올 초 국내에서 처음으로 방송 광고가 허용되었다는 피임약 텔레비전 광고를 보고 있자니, (여성의) 성에 관해서는 최첨단 마케팅 전략이라는 것도 ‘일반인의 상식’을 이길 수는 없는 모양이다. 핸드폰 벨소리 하나 사게 만드는 데도 성을 팔고 있는 이 판국에 정작 성과 관련된 상품은 전혀 섹슈얼할 수 없다는 아이러니는, 그 자체가 우리 사회의 성인식 수준이려니 하고 넘어가자. 하긴 상품을 유효성으로 파는 시대는 지났으니 “이 피임약, 써보니 참 좋아요”라고 멀쩡한 여자가 자신 있게 광고해도 촌스러웠겠다.

광고는 이렇게 시작된다. 젊고 똑똑해 보이는 여성 모델은 서울대 누구라며 다짜고짜 자신을 소개한다. 도서관에서 멋들어지게 책을 펼쳐본 후에는 느닷없이 “울고 짜는 것은 딱 질색”이란다. 이 대사가 꼭 나를 두고 하는 말 같은 느낌이라는 건 일단 이 광고가 비호감이라는 이야기다. “경험은 없지만 당당하게 챙길 거예요”라는 마지막 말에서는 그야말로 게임 끝이다. 공부도 잘하고 사랑도 당당한 젊은 여자는 ‘지금’ 필요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위해 이 약을 산다는 광고인 셈이다. 잠재적 소비자인 나는 이 약을 사고 싶은 마음이 전혀 안든다.

당당한 거, 뭐 좋다. 그런데 그것이 왜 현재가 아니고 미래여야 하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피임약을 사는 여성들이 당장 필요하지 않은 데도 ‘당당한’ 미래를 위해 쭈뼛거리며 약사에게 약 달라 하겠는가? 이 피임약 광고는 안전한 섹스를 파는 것이 아니라 혹 여성의 순결을 팔고 있지는 않은가? 광고는 이 약을 사는 사람은 아직 ‘경험 없는 순결한’ 여성임을 알아달라고 강조하는 듯하다.

‘순결을 파는 피임약’이 등장하는 우스꽝스러운 현실은 섹스에 대한 한국 비혼 여성들의 부담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천연덕스럽게 알아서 피임하는 여자라면 상대남에게 ‘유경험자’라 의심받을 것이고, 그렇다고 전혀 신경 안 쓰는 척해도 ‘울고 짤지도 모를 일을 초래하는 칠칠맞은 푼수’로 여겨져 에로틱 점수가 깎일 것이다. 하는 듯 안하는 듯, 당당하지만 너무 선수는 아닌 듯 줄타기하면서 피임해야 한다니, 섹스가 죄냔 말이다. 안전한 섹스나 임신 걱정 없는 쾌락이 아니라면 여자들이 피임약을 사야하는 이유는 내가 알기로는 없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이런 전략을 짤 수밖에 없는 제약회사의 고민도 짐작되긴 하지만, 아무래도 제 무덤을 파지 않았나 싶다. 회사가 대상으로 정한 20~30대 여성들이 피임약을 가장 많이 살 것이라는 가설도 검증이 필요한 것인 데다, 피임약을 사는 20~30대 비혼 여자라면 ‘미래’ 운운하는 것이 오히려 기분 나쁠 것이다. 더욱이 올해 이 회사가 대학생을 상대로 연 피임약 광고공모전에서 1등상을 받은 문구가 ‘당신은 쾌락을 사랑하는 여자가 아닙니다’라니 갈수록 태산이다. 피임이란 현재의 섹스를 전제로 한다는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기만 해도 최소한 “피임약 왜 파냐”는 핀잔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광고 만들려니 모델이 없다고? 연락하시라. 출연할 용의는 얼마든지 있다.

정박미경/ 자유기고가 chaos400@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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