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사랑 제주 아방모임 사람들이 처음으로 모여 오성근(가운데 줄무늬 티셔츠 입은 이)씨네 텃밭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전업주부’ 오씨는 “낮부터 사람들 먹이려고 닭 삶아 찢고 녹두 불려 닭죽을 쑤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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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의기투합 ‘딸사랑 제주아방 모임’
창조 여신 설문대할망과 구휼할망 김만덕의 전설이 살아 숨쉬는 제주. 예로부터 ‘여자의 섬’으로 유명한 이곳에서 딸을 키우는 아빠들이 한 데 모였다. ‘딸을 사랑하는 제주 아방 모임’.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앞바다까지 발이 닿았다던 설문대할망처럼 품 넓고, 배곯는 백성들을 먹여살린 김만덕처럼 통 큰 딸을 키우려는 아빠들의 모임이다. 여전히 남자를 앞세우는 분위기에 짓눌리지 않고 딸들이 저마다 마음껏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거름을 주려는 아빠들의 모임이다. 지난 5월 첫 모임을 제안한 이는 ‘남자 전업주부’로 널리 알려진 오성근(41)씨다. 2000년 <매일 밥상 차리는 남자>를 펴낸 뒤 2001년 ‘평등부부상’을 받았고, 인터넷 까페(cafe.daum.net/babsangman)를 통해 ‘딸 사랑 정신’을 알리고 있다. 오씨는 직장에 다니는 아내를 ‘바깥 양반’이라 부른다. 자신은 아이를 키우며 집안일을 한다고 명함에 ‘하우스허즈번드’라고 적어놓았다. 경기도 과천에서 제주 조천읍 교래리로 이사한지 이제 4개월 남짓. 딸 다향(8)이는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아담한 학교에 다닌다. 공무원인 아내 이정희(36)씨도 최근 제주로 발령을 받아 다시 온가족이 한데 모여 살게 됐다. 지난 2001년 서울에서 ‘딸을 사랑하는 아빠들의 모임’ (딸사모)을 만들어봤던 터라 ‘아방 모임’을 만드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서울에서 ‘딸사모’를 함께 하다 먼저 제주로 내려와 살던 박병로(39)씨가 합류했고, 과천에서 함께 동화읽기 모임을 하다가 제주로 이사온 이창덕(38·사업), 양은영(36) 부부와 모임의 큰 형님 김제삼(51·농부)씨도 힘을 모아줬다. 역시 과천에서 온 김욱호(48·공무원)씨와 제주 토박이 출신 최아무개(43·회사원)씨까지 모두 7명이 ‘아방 모임’에 이름을 올렸다. 자녀에 자연 돌려주려 이사한 평등 부부상 오성근씨 등 7명딸 낳고 세상 불평등 눈뜬 경험 “아이들이 만족하는 삶 살기를” ‘아방’들 가운데 한명을 빼고는 모두 서울·경기 지역의 ‘뭍’ 출신들이다. 왜 제주로 갔을까? 오씨는 “도시에서 살 기회는 얼마든지 있지만, 자연과 함께 한 어린시절의 기억은 때를 놓치면 만나기 힘들다”고 했다. 양씨도 “아이들과 부모가 함께 하는 여유로운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고 거들었다. 아내의 권유로 모임에 참여해 조금 낯설어하던 김씨는 “이사갈 때 자기 빼놓고 갈까봐 아내가 좋아하는 강아지를 볼모삼아 안고 있는 남편이 되고 싶지 않다”며 웃었다. 이들은 딸을 낳고부터 세상을 다시 보게 됐다고 했다. 딸을 낳으면서 ‘아방’ 구실에 맨 처음 눈 뜨고, 딸들이 남자들과 불공정한 경쟁을 하게 되거나 여자라고 기 죽을까 걱정하면서 두번째로 눈을 뜨고, 딸들을 함께 키울 학교나 이웃 생각을 하면서 세번째로 눈을 뜨게 되었다는 얘기다. 박씨는 “집에서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아버지였지만 지나보니 내가 잘못 판단한 점이 많았다”며 “지금은 집사람 의견을 통보받고 지낸다”고 말했다. 나이 들수록 가족에게서 멀어져 외면당하는 아빠들의 현실 또한 이들에게 자극제가 되었던 모양이다. 오씨는 “여자들은 모여 수다라도 떨지만 남자들은 풀 데가 없다”며 “지금은 아빠들 간에 친목을 다지는 모임에 머물러있지만, 앞으로 남녀평등 같은 사회적 문제에 대해서도 구실을 하게 되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들은 7월께 자연휴양림을 빌려 1박 2일 동안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는 법에 대해 전문가의 강의를 듣고 함께 소풍도 하기로 했다. 대안적인 삶이란 거창한 타이틀을 붙이지 않아도 좋다. 다만 이들이 꿈꾸는 건 남과 비교하거나 비교 당하지 않고 사는 평등하고 소박한 삶이다. “아이들이 스스로 만족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빠의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당탕탕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뒤로하고 김욱호씨가 말했다. 제주/글·사진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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