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6.08.01 16:04
수정 : 2006.08.02 15:54
‘제자들의 인터뷰’ 책으로 펴낸
실라 컨웨이 교수 /
실라 컨웨이(54) 교수의 ‘한국 사랑’은 깊다. “나는 역마살 있는 사람”이라든가 “청국장을 좋아한다”는 얘기만 들어봐도 그간 한국 사람들과 얼마나 살갑게 지내왔는지 금세 눈치챌 수 있다. 인사동에서도 그랬다. 그는 인사동 골목 찻집들의 내력과 특징을 줄줄 꿰었다. 뜨거운 대추차에 곁들인 유과도 맛있게 먹어치웠다.
“귀천 아시죠? 천상병 시인의 찻집. 여긴 분점이고, 본점은 다른 곳에 있지요. 이 항아리 안에 물고기가 들어있는데,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그는 영국, 캐나다, 자메이카 등을 두루 돌아다녔지만 유독 한국에 애정이 많다. “한국인은 고향인 아일랜드 사람과 다혈질적인 기질이 비슷해 정이 간다”고 했다. 그는 지난 96년부터 한국의 외국어대와 서울대 등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10년간 일했다. 올 가을엔 고향인 아일랜드로 돌아간다.
“벌써 그리워요. 한국 음식, 사람들, 특히 학생들.” 학생들에게는 ‘별난 교수님’으로 알려졌다. 강의 첫날, 그는 곁에 앉은 사람들의 손을 잡고 체온을 느껴보라고 말했다. 영어공부인지, 페미니즘 공부인지 모를 성평등 강의와 페미니즘 논쟁도 거듭했다. 어느날 취업준비에 바쁜 4학년 학생들에게 기절 초풍할 숙제를 냈다. “부모님의 손을 가만히 잡아보고, 만져보고, 일생을 인터뷰 해오세요.” 그게 벌써 6년 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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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귀천’에서 만난 실라 컨웨이 교수. 그는 “옛 이야기를 말하고, 듣는 데서 과거에 대한 치유가 시작된다”며 “한국인들도 자신의 이야기를 소중하게 이어가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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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취업 준비로 바쁜 졸업반 학생들의 반발이 컸다. “부끄러워요! 부모님을 어떻게 인터뷰해요?” 비행사인 아버지 이야기를 써낸 최주원씨도 처음엔 “뜨악해했다”고 한다. 어색함을 무릅쓰고 억지로 자리에 앉으니, 평생을 거쳐 쌓인 슬프고 기쁜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20년을 넘게 함께 살면서도 못 들은 가슴 저린 얘기들이었고, 소중한 경험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학생들은 서서히 ‘외국인 선생님’의 마음을 읽기 시작했다. 작업에 불이 붙었다. 지방까지 내려가 부모를 만나고 온 학생, 아버지와 함께 노래방에 가 녹취를 해온 학생, 편지로 이야기를 주고 받은 학생도 있었다.
그렇게 최근 엮어 낸 책이 <하늘을 나는 푸른 자전거>(정음)다. 출판사는 수십편의 원고 가운데 14편을 간추려 묶었다. 전쟁, 가난, 군사독재, 고도성장 등을 겪으며 숨가쁘게 살아온 부모들의 이야기는 어떤 역사책보다 생생했다.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남보다 더 손해를 본 아버지, 여자라고 공부하지 못한 할머니, 딸을 낳아 서운해 운 어머니의 이야기들이 더할 수 없이 솔직하다.
6년전 내준 ‘엉뚱한 숙제’ 책으로 내기까지 많은 시련
“한국인들 옛일 잊지 마세요 과거는 미래의 씨앗이니까”
“살아있는 진짜 역사죠. 자신이 살아온 얘길 하고, 자식이 그 이야기를 듣고, 공감하는 것은 중요해요. 그간 살아온 상처를 치유하는 첫 걸음이 되니까요.”
온전히 책으로 엮기까지 6년이 걸렸다. 모든 원고는 평균 10번 정도의 수정을 거쳤고, 일부는 국내외 영자 신문사에 보냈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다 미국에서 세상을 떠난 한 아버지의 이야기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타임즈에 실리기도 했다.
“3개월 동안 북한산 밑의 고시원에서 살면서 밤낮으로 책을 편집했어요. 출판사를 알아보려고 자비를 들여 직접 독일 프랑크푸르트 책박람회장까지 날아갔죠. 영문판과 한글판을 따로 내려고 한국과 영국의 35군데 출판사에 원고를 보여봤지만 모두 거절 당했어요. 이야기는 좋지만 많이 팔리기 어렵다면서.”
요즘 한국인들은 어려웠던 옛 일을 잊으려 하는 걸까. 맘 맞는 출판사를 찾기까지 몇년이 걸렸다. 한국은 전자기술과 통신문명의 왕국이 되면서 지금의 거름이 되는 옛 이야기를 잃어버렸다. 아일랜드와도 닮았다. 이 나라는 800년 동안 식민지배를 겪고 유럽연합이 등장한 뒤 급속도로 풍요로워졌다. 반면 곰삭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고통과 기쁨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이들이 사라져갔다. 그는“한국인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길 바란다”고 했다.
“언젠가는 반드시 부모들의 지혜와 경험이 필요할 겁니다. 과거는 미래의 씨앗이 되니까요.”
오는 9월14일, 서울 하이야트 호텔에서 책발간회 겸 후원회를 연다. 6년 전 대학생 시절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 ‘사회인’이 된 제자들이 한 데 모인다. 책 판매수익금 전액은 폭력과 가부장제에 고통받는 여성에게 도움이 되라고 한국여성의 전화에 기부하기로 했다. 그가 ‘제2의 조국’인 한국에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기도 하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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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라 컨웨이의 삶은… /
한 많고 정 많고… 아일랜드도 똑~같아요
실라 컨웨이 교수는 “한국 전후세대와 강한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가난한 아일랜드 시골에서 태어난 그는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에도 변변한 비옷 한벌 없이 자전거로 매일 30킬로미터를 통학했다. 오로지 공부에 대한 집착 하나만으로 어려움을 견뎠다. 한국처럼 아일랜드에서도 가난에 찌든 집안의 딸은 배우기가 힘들었다.
자연스럽게 핍박받는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많았다. 할아버지는 영국의 식민지배에 맞선 아일랜드공화군(IRA)의 전사였다. 고모는 레스토랑 폭탄 테러의 주범으로 무고하게 몰린 아일랜드 민간인 5명에 얽힌 사건 ‘길포드 파이브’를 세상에 알린 사라 클라크 수녀다. 그뒤 이 사건은 <아버지의 이름으로>라는 영화로 널리 알려졌다. 영화감독 켄 로치는 컨웨이의 고향마을 이야기를 <보리밭에 부는 바람>이란 영화로 만들어 올해 칸느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받았다.
패미니즘 눈뜬 뒤 여성 돕기, 부모 잃은 한국아이 양자 삼기도…
“삼촌에게서 이런 이야기들을 듣고 자랐어요. 구전역사죠. 한국인이나 아일랜드인이나 ‘한’과 ‘정’이 많은 사람들이에요. 내 어머니의 삶도 한국 어머니들과 똑~같아요. 아버지는 책만 보는 ‘선비’였는데 주변 사람들이 어머니에게 똑똑한 남편 뒀다고 하면 어머니는 ‘모르는 소리 말라’며 치를 떨었어요. 하하.”
영국에 건너가서는 68혁명의 영향으로 페미니즘에 눈을 떴다. 캐나다에선 직접 3개의 여성단체를 만들어 여성들을 도왔다. 한국에 와 영어를 가르칠 때도 곧잘 남학생들과 논쟁하곤 했다. 남녀차별은 어디서부터 비롯되는가, 한국 여성들의 데이트 폭력은 왜 생기는가.
“수업시간에 멍이 든 채로 앉아있는 여학생을 보면 연구실로 불렀죠. 얘길 들어보면 남자친구에게 맞았다는 거예요. 유엔개발계획의 한국 여성 권한척도가 전세계에서도 밑바닥이에요.”
그는 한국의 전통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전통이란 이름으로 포장한 가부장적 폭력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때문에 더욱 여성과 어머니들의 삶에 대해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알고 이해해야 답습하지 않고, 미래를 바꿀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제자들과 함께 여성단체를 후원하고, 부모를 잃은 청소년을 데려다 2년 동안 양아들삼아 키우기도 했다. 이어 1600만원에 이르는 후원금을 모아 임대아파트를 얻을 수 있게 도왔다. 이제 다 자라 따로 독립한 민수(가명)는 여전히 “너무 멋진 내 아들”이다.
“이제 저도 제 조상에 대한 얘길 해야죠. 1940년대 아일랜드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로 쓰고 있어요. 언젠가 들려드리고 싶어요.”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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