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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8.08 16:29 수정 : 2006.08.09 13:52

제4회 ‘성폭력 피해생존자 말하기 대회’는 처음으로 실내가 아닌 바깥에서 행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행사의 기획에 참여한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들. 왼쪽부터 어린, 거북, 지선, 오매.

피해자가 수치심을 갖고, 가해자가 되려 억울해하는 범죄. 말하면 말할수록 도리어 피해자에게 쏟아지는 편견과 의혹의 시선이 증폭된다. 바로 성폭력이다.

이례적으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함께 모인다. 올해로 4회를 맞는 ‘성폭력 피해생존자 말하기 대회’다.

12일 성폭력 피해자 말하기 대회
건물밖으로 나온건 올해가 처음
원하면 즉석참여 할 수 있어

한국성폭력상담소가 여는 이 행사는 오는 12일 오후 4시부터 서울 성균관대 운동장에서 막을 올린다. 이번 행사를 진행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의 활동가들은 긴장과 기대감이 교차하는 표정이었다. 올해 행사는 처음으로 실내가 아닌 건물 바깥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지선, 오매, 거북, 어린(상담소에서는 이름보다 별명을 부른다) 등 이번 행사의 주축인 4명의 활동가는 부담감도 큰 듯했다.

“가장 큰 특징은 처음으로 ‘광장’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점이죠. 3회 때까지는 무대가 있는 공연장 등을 빌려 참가신청을 한 소수의 사람을 대상으로 해 다소 폐쇄적으로 운영했어요.”(지선)

예전엔 ‘안전한 공간’에서 말하기를 원하는 참가자들의 요구가 컸다. 남성 참여자 때문에 말하기 거북하다며 항의하는 참가자도 있었다. 올해는 다르지만 지난해까진 말하기와 듣기 신청자들을 따로 받았다. 피해를 증언하는 이들에 대한 비난이나 돌출 발언을 염려했기 때문이다. 듣기 신청자들이 마이크를 잡고 자신의 경험을 말하는 건 원칙적으로 허용되지 않았다. 행사 일시와 장소도 비밀이었고, 취재와 연구 목적의 참관도 불가능했다.

올해는 다르다. 더 크게 열린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로 했다. 참가 신청서를 따로 받긴 하지만 성폭력의 경험을 말하는 사람과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의 구분이 없다.


“말하는 순간이 바로 치유의 시작입니다. 가해자를 향해 욕도 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같이 소리질러보는 마당이 필요합니다.”(오매)

이들은 ‘피해자’란 말 대신에 ‘생존자’란 말을 쓴다. 소극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벗어나 적극적인 존재로 상처 아닌 상처에서 벗어난다는 뜻을 강조하려고다. 이들은 “경험을 말하고, 듣고, 지지받는 경험만으로도 치유받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다독이는 말 한마디로도 “내 잘못” “나만 문제”라는 생각에서 탈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트 성폭력, 강도 강간, 친족 성폭력, 술자리 성폭력, 어린이 성폭력 등 수많은 ‘성폭력 피해생존자’들의 ‘다양한 생존 방법’을 공유할 수도 있다. 다만 걱정도 있다.

“얘기의 물꼬를 먼저 트는 것이 중요하겠죠. 계획이 없는 상황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죠. 많은 여성들이 모여서 얘기하는 만큼 힘이 생긴다고 생각해요.” (거북)

사실 올해 행사를 준비하면서 이 행사를 ‘소규모 집단 치유’ 형식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열린 목소리’를 중요하게 생각할지에 대해 오래 토론했다. 결국 열린 공간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으기로 했다. 물론 이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는 광장이 될 수 없다. 명동 한복판이나 시청 앞 같은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좀더 열린 행사를 하기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건물 안에서 밖으로 나온 것만도 큰 진전이다.

어린은 “밀실에 혼자 갇혀있지 않고 세상을 향해 자신의 피해와 분노와 아픔을 외치는 일은 극복과 성공의 경험을 동시에 가져다준다”고 말했다.

올해 행사 참가자 규모는 200~300여명 남짓. 매년 조금씩 참가인원을 늘려왔다. “복수하는 여자는 나쁜 여자, 참는 여자는 훌륭한 여자”라고 내면화한 한국 여성들을 모아 광장에서 말하기 행사가 가능할지 고민했지만 이제 여건이 성숙됐다는 믿음도 있다.

“두렵기도 하고, 주저하는 사람도 있을 테죠. 세상에 진실을 알릴 필요가 있어요. 말하지 않고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해결방법과 필요성을 알 수 없으니까요.”(어린)

‘통곡의 바다’를 이뤘던 지난 대회에 비해 이번 대회 때는 ‘힘’과 ‘재미’를 덧붙일 계획이다. 성폭력 피해 경험에 대한 다양한 해결방법도 모색할 계획이다. 깊은 밤이 되면, 행사장에서 조촐한 뒤풀이도 연다. 문의 speakout2006@hanmail.net

글·사진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지난해 서울 대학로 쇳대박물관에서 열린 성폭력 피해생존자 말하기 대회 장면. 한국성폭력상담소 제공
■ 성폭력생존자 말하기 대회 ■

피해경험 서로 나누고 어루만져

지난해 우리나라 성폭력범죄 발생건수는 1만2446건. 피해자가 더 비난받는 속성 탓에 신고율은 연간 2~10% 미만이다. 말하고, 드러낼수록 피해가 커지는 까닭에 신고율이 크게 늘지 않고 있다. 성범죄는 70~80%가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며 이 가운데 12~15% 가량이 가족 내 성폭력 사건이다. 교도소 조사에서는 성폭력 사범 전체의 20% 정도가 친족이다. 이런 피해자들은 더 오래 입을 닫는다. 상처는 안으로 곪아 들어가기 마련이다. 대인기피, 우울증 발생율이 다른 범죄에 비해 높다. 자연재해나 사고 뒤 겪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잇따르기도 한다.

성폭력 말하기 대회는 이런 피해를 막는 일종의 집단치료다. 호주, 미국 등지에선 15년 전부터 ‘스피크 아웃 데이’가 있어 탁 트인 광장에서 수천명이 모여 매년 이같은 행사를 연다. 행사 참가자들은 낮에는 성폭력의 경험을 서로 나누고, 밤에는 시위를 하면서 웃고, 떠들고, 함께 소리치며 비슷한 상처를 서로 어루만진다.

우리나라에선 올해가 4회째

지난 2003년 우리나라에서 처음 열린 1회 대회의 제목은 ‘세상아 들어라! 나는 말한다’였다. 작은 행사장에서 100여명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소규모 집단 치료를 하며 참가자들은 서로를 격려했다. 행사가 차츰 커져 처음으로 언론에 공개한 지난해 행사에선 140여명의 남녀가 모여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서로의 힘든 경험에 박수를 쳐주며 지지하는 행사를 가졌다. 피해자들은 처음으로 “가해자, 너에게 모든 책임이 있어!”라고 소리칠 수 있었다. 지난해 여연은 ‘성평등 디딤돌’로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 참여자 24명을 선정하기도 했다.

올해 행사의 제목은 ‘그녀들, 광장에서 별별 말하다’다. 말하기와 듣기 참여자가 구분이 없어 누구나 원하면 마이크를 잡을 수 있다. 이른바 본격적인 여성의 ‘성토대회’가 될 전망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활동가 오매는 “위축되지 않고 서로 얘기를 나누며 해결점을 찾고 자신을 치유하는 수많은 방법을 찾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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