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6.08.08 16:40 수정 : 2006.08.09 13:52

2050 여성살이 /

바람난 남자를 사이에 둔 아줌마와 처녀. 그 두 여자의 영혼이 바뀌는 좌충우돌을 그린 드라마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미모의 처녀 몸으로 다시 돌아간 마흔의 아줌마는 그야말로 ‘땡잡았다’. 그렇다면 스물여덟의 처녀는? 처지기 시작하는 살들과 알록달록 기미 덕에 ‘남자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중년 여자로 살아가야한다는 것이 날벼락이다. 무늬만 젊은 몸이 펄펄 넘치는 에너지로 첫사랑과 데이트를 즐기는 사이, 무늬만 중년인 몸은 팔자에 없는 아이 학원 보내랴 시어머니 저녁 차리랴 지치고 피곤하다.

영혼은 마흔이고 몸은 스물여덟인 여자, 여자들이 꿈꾸는 최고의 궁합이라 할만하다. 헷갈리지 말아야 할 것은, 젊은 날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여전히 마흔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내가 만난 마흔의 여자들 중 그 누구도 이십대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한국사회에서 스무 살과 서른 살의 여자 삶을 살아내 생존했다는 것을 스스로 대견해 하기까지 한다. 스무 살의 여자란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여자하기 나름’인 줄 알았던 남자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친다는 것을 두고두고 알아가야 하는 나이 아닌가?

“여자 나이 마흔으로 사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야. 주름은 좀 깊어지고 기운이 없는 게 흠이긴 하지만….” 드라마에서 “중년의 몸으로 어찌 살꼬”를 연발하는 처녀의 영혼을 위로하는 마흔 살 먹은 여자의 대사는 체념이 아니라 체화에서 나온 울림이 있다.

그런데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여자라 하더라도 젊은 육체에 대한 욕망을 코웃음 치기란 여전히 힘들다. 여자의 나이가 여성성의 상실로 인식되는 사회에서 나이 들수록 몸도 늙어가는 자연의 섭리가 여자의 삶에는 관철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들의 늙음은 중후함이나 카리스마로 찬미되지만, 여자의 늙음은 마귀할멈과 극성스러움과 무성성으로 연결되곤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이듦의 중후함을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여자는, 명예 남성이거나, 도덕적으로 흠잡을 데 없는데다 나이도 가늠할 수 없는 어르신이거나, ‘몰여성적’이기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을 제외한 보통의 여자들은 늙음에 대한 어떤 보호막도 없는 사회에서 생존하는 법을 나름대로 체득할 수밖에 없다.

마흔의 영혼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여자들에게 스물여덟의 육체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드는 사회는 덜 익었다. 여성에게 젊은 육체를 유지하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미성숙한 영혼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이다. 그러니 나이 들수록 강해지고 지혜로워지는 여자들의 영혼은 정말이지 갈 데가 없다. 여자 마흔의 영혼이 육체의 젊음을 걱정할 필요만 없어도, 인류의 문명은 훨씬 더 진화했을 텐데 말이다. 결국 여자들에게 젊어지라고 강요하는 것은 반문명의 대죄를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알았으면 좋겠다.

정박미경/자유기고가 chaos400@empal.com



광고

관련정보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