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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6.09.05 19:13 수정 : 2006.09.06 17:34

2050 여성살이 /

무자비하게 더웠던 8월 어느 날 아침, 모처럼 부지런을 떨며 지하철 첫차를 탔다. 광화문 서울시민대학에 도착하니 여섯시 반. 근데 이게 웬일? 요즘 대학교 수강신청이 전쟁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9월 개강하는 시민대학의 수강신청 열기 또한 장난이 아니다. 뱀처럼 긴 줄이 대학 건물 주위를 칭칭 감고 있었다. 라틴 댄스 강좌에 신청하러 미리 대기중인 친구들을 찾아 슬쩍 끼어들었다. 도끼날 같은 시선들이 팍팍 내 몸에 와 꽂힌다. 식은땀이 난다. 수강 신청은 8시부터 받는데 새벽부터 줄을 서야 원하는 강좌를 들을 수 있다는 소문이 사실이었다.

놀라운 건 시민대학 입학생들의 평균 연령대. 얼핏 둘러봐도 반수를 넘는 지원자들이 60대 이상의 ‘시니어’들이다. 서울의 문화유적과 역사를 배우는 서울학 강좌를 포함해 부동산과 펀드 투자, 국제관계와 문화 이해, 문예창작, 사진, 외국어와 컴퓨터 등 가을학기 100여개 강좌가 12월까지 넉달 동안 계속된다. 이 중엔 자격증을 목표로 하는 카이로프랙틱이나 논술지도사 과정도 포함돼 있다. 매주 한두번 강의가 있고 학기당 평균 수강료는 6만원. 엷은 화장을 곱게 한 ‘젊은 할머니’ 몇 분이 컴퓨터 전문용어를 구사해가며 토론중이시다. 컴퓨터 중급반 입학에 앞서 간단한 테스트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 오, 놀라워라, 대한민국 향학열! “컴퓨터 배워서 취직하시려고요?” 농담을 거니 “그러면 얼마나 좋아”라는 경쾌한 답변이 날아온다. “그냥 배우는 게 재밌고 좋아. 동영상도 올릴 수 있고. 컴퓨터, 알고 보니 이건 완전 신세계야, 신세계!” 그 옆 예쁜 할머니도 한 말씀, “집에 혼자 있으면 우울증 걸려. 사느라 바빠서 전화 안 하는 자식들 원망이나 하게 되고 말야.” 별 생각 없이 건들거리며 댄스 강좌에 등록하러 온 내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60대 이상의 시니어를 뜻하는 ‘어르신’이란 호칭에 존경심이 그리 많이 담겨 있지 않은 건 사실이다. 유머감각 없는 노년이라는 부정적 인상을 주는 경우마저 있다. 오랫동안 간장 된장 고추장으로 대표되는 웰빙 살림의 지존으로, 먼 병원 대신 온갖 민간 치료 노하우를 갖춘 육아와 어른 섬기기의 달인으로 인정받던 여성 원로들의 시대가 있었다. 독립운동 떠난 남편 대신 보따리장사로 자식들을 키우고 일찍 세상을 떠난 남편이 남긴 아이들을 홀로 키워낸 억척 여성 농민들의 시대도 불과 한두 세대 전이다.

삶의 무대에서 한발짝 물러나온 이들만이 가진 직관과 통찰로 후배 주자들에게 금쪽같은 명대사를 날릴 수 있는 할머니들의 존재는 한낱 전설일까? 현실은 전혀 우아하지 않다. 〈6시 내고향〉의 정형화된 마을 풍경과 노년의 모습은 노년에 대한 고정관념을 반영한다. 선거철 텔레비전 카메라는 공원에 앉아있는 무표정한 노인들을 그저 유권자 집단으로 비춘다. 그 어느 쪽도 노년에 이른 인간에 대한 예의를 갖추지 않았다.

한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값싸고 접근이 쉬운 시민대학에 시니어들이 몰려드는 건 아무도 지켜주지 않는 노년기 삶의 존엄을 수호하려는 비장한 결의 같다. 이 젊은 노년들의 욕구를 읽어내는 교육과 인턴십 프로그램 개발이 동시다발로 이뤄졌으면 좋겠다. 다양한 역할 모델 실험도 고정관념을 깨는 능동적 방식으로 있어야 하겠지. 유급 또는 무급 고용 창출 프로그램과 연계되어야 할 테고. 공공기관 안내 도우미, 숲 해설사, 구민회관의 문화 프로그램 강사, 청소년복지관의 직업훈련 도우미, 재활용 가게 매니저, 공연장의 시간제 베이비시터 등 찾아보면 얼마든지 도전할 역할이 있을 것 같다. 물론 핵심은 새로운 역할을 모색하고 학습하려는 개인의 의지와 맞물려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겠다.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업그레이드하려는 원초적 본능을 포기하지 않는 것, 결국 나이를 먹는 기술일 것이다.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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