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우먼 애환 다룬 퓨전춤극 ‘토끼의 간’ 23일부터 공연
직장·가정서 고군분투하다 간 뺏긴 얘기 ‘위로와 공감’
이화여대 무용과를 졸업하고 주류 무대를 거부해 주목받아온 창작춤집단 ‘가관’이 우리 시대 ‘간 큰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다. 23일부터 25일(목~금 오후 8시, 토 4·7시)까지 서울 문화일보홀에서 여는 춤극 <토끼의 간-수궁광녀전>이다.
작품은 전직 방송국(에스비에스) 피디 출신 사진작가 퀸콩(본명 홍수정·37)의 작품 <간이 배 밖에 나온 여자>에서 모티브를 따왔다. 직장과 가정 사이에서 고군분투하는 직장 여성의 이미지를 담은 퀸콩의 사진 원작을 토대로 가관의 허유미(32·왼쪽), 조세진(33·가운데), 최은화(33·오른쪽)씨와 소설가 박정애씨, 사진작가 김화용씨 등이 힘을 모았다. 이른바 복합장르 공연. 사진, 영상, 춤, 극이 한 데 어우러졌다.
줄거리는 전래 설화인 ‘수궁전’에서 출발한다. 토끼 간을 가져오라는 용왕의 명령을 받은 거북이들이 뭍에 사는 ‘간 큰 직장 여성 토끼’를 꼬드겨 간을 꺼내고, 간을 빼앗긴 토끼들은 스스로 치유해 되살아난다는 줄거리다. ‘가관’ 허유미 대표는 이 작품이 “직장여성이었던 원작자 퀸콩의 실제 경험”이라고 말했다.
“직장에 다니면서 모유수유를 했대요. 흐르는 젖을 회사 화장실에서 남몰래 짜버릴 때 심정이 어땠겠어요. 그렇게까지 힘겹게 일했는데 어느날 간암 선고를 받은 거죠. 병원에서 보니 자신 같은 30대 직장여성 암환자가 너무 많았대요. 아, 내 간이 너무 커서 용왕님이 간을 꺼내갔나보다, 간 절제수술을 하고 작품을 구상했죠.”
작품엔 가정과 직장 안에서 능력을 모두 인정받으려는 ‘수퍼우먼 콤플렉스’의 허구성을 고발하면서 지구를 휩쓸고 있는 자본주의적 가부장제가 여성(토끼)의 몸(간)을 혹사한다는 의미도 함께 담았다. 집안 일, 육아, 사회적 성공 가운데 무엇하나 포기할 수 없는 수퍼우먼의 강박과 실적과 경쟁을 요구하는 사회적 강요에 안팎으로 시달리다보면 스스로 몸을 해치는 독기를 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가관’ 단원들은 퀸콩의 이야기에 자신들의 경험을 보태려고 치열한 토론을 거쳤다. 춤에 영혼을 불어넣고 살을 붙이는 과정이었다. 30대 여성들이 모여 자신의 얘기를 하다보니 저절로 비정규직에 내몰리는 젊은 여성들의 모습 등이 중요하게 부각됐다. 부당한 대우에 항의조차 할 수 없는 그들의 이야기를 강간 장면으로 표현했다. 허 대표는 “춤을 추면서도 실제인 듯한 아픔이 느껴졌다”고 했다.
“이 장면에 이르러서는 몸이 저절로 반응하더라구요. 남자 배우에게 얻어맞는데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나오고, 꼼짝할 수가 없었죠. 부당하고 폭력적이지만 어쩔 수 없이 억압받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사회적 강간으로 처리하고 싶었어요.”
날아다니는 중절모 하나를 가지려고 서로 안달하며 뛰고 달리는 이 시대의 ‘간 큰 토끼’들. 그들의 모습은 ‘나 다움’을 잃고 남의 인정만을 바라는 직장인들의 모습이다. 허공을 가르는 중절모는 바로 권력. 하지만 중절모는 결국 아옹다옹하는 토끼들의 손에 주어지지 않고 남자 배우의 손에 돌아간다.
춤극의 내용은 다소 냉소적이고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어둡다. 대본을 맡은 소설가 박정애씨가 여신의 치유 에너지로 토끼들이 회복하는 다소 희망찬 결말을 제안했지만 ‘가관’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공연은 두 여성의 탱고로 끝맺는다. 삶을 이어가려고 신에게 의지하기보다는 바로 곁에 선 동료의 호흡과 에너지를 주고받으며 함께 치유한다는 결말이다. 허 대표는 “이 시대의 고통받는 수많은 ‘간 큰 토끼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줄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작가 퀸콩은 전자우편으로 “가관, 그리고 공동작업을 하시는 여러 작가분들의 경험과 관점이 덧붙여져서 새로운 작품으로 재창조되기를 기대한다”고 전해왔다. 공연은 이 시대 모든 힘겨운 여성들에게 보내는 오마주가 될 참이다. (인터파크 interpark.com, 1544-1555, 일반 2만원, 학생1만5000원, 여성주의 활동가 50% 할인)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사진 김화용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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