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1.30 19:15
수정 : 2007.01.30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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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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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
작년 정월 대보름 가족 모임에서 사후 시신을 외손녀가 다니는 대학병원에 기증하시겠다는 선언으로 우릴 놀래켰던 친정 엄마. 분당 아파트촌을 떠나 대구에서 텃밭 농민 커리어를 개척한 박 여사가 80회 생일을 맞으셨다. 일본 식민지 시대 전라도 나주 밀양 박씨 문중, 창씨 개명을 거부한 가문의 내력 때문에 광주에 있던 지방 명문 여중의 면접을 통과하지 못했다는 엄마. 처녀 시절 초등교사였고 한국 전쟁을 겪었다. 1951년 결혼, 사흘만에 ‘불평등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걸 깨닫고 복직을 시도하기도 했다. 남편의 반대로 좌절된 뒤엔 울분을 삼키며 딸 넷 아들 하나를 낳아 기르셨다.
해마다 어린이날 엄마는 딸들에게 맞춤 원피스를 선물하셨다. 분명 가정 경제에 무리를 해가며 어린이날 이벤트를 감행하셨을 게 분명하다. 덕분에 내게 어린이날은 시내 양장점에서 갓 지은, 오렌지 색 허리 리본 달린 블루 원피스의 새 옷 냄새로 기억된다. 1960년대, 딸들은 집 안팎에서 그리 대접받지 못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 모든 건 딸 하나하나를 귀한 손님 대접하듯 키운 ‘원조 페미니스트’ 박여사의 힘이었으니.
내가 광주서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 아버지가 실직, 가족은 서울로 이주했다. 교통 사고 후유증으로 누운 아버지를 대신해 엄마는 파출부 일을 하셨다. 아침마다 돈 달라는 다섯 아이의 입과 학비에 남편의 뒷바라지까지, 멀미났을 가장 노릇을 엄마는 씩씩하게 해내셨다. 경제적 어려움을 절박하게 겪어서일까? 엄마는 딸들에게 남편으로부터의 경제적 독립을 강조하셨다. “남편에게 의존하면 할수록 존경 못 받는다”는 말은 엄마에게 내가 받은 결혼 선물이었다. 둘째 아이를 대구에서 낳고 아기 돌볼 분을 찾지 못해 직장을 그만 둬야겠다고 신세타령을 한 다음날 아침, 엄마는 한 걸음에 대구까지 오셔서 내 아이를 맡으셨다. 딸 넷의 산후조리를 공평하게 한 달씩 해주던 엄마. 외동 며느리의 산후 조리도 사돈댁으로 보내지 않고 직접 맡으셨다. “며느리도 내 딸이니 당연히 내가 거둔다”는 게 엄마의 생각. 그리곤 며느리에게 “추석이나 설 명절 중 한 번은 친정에 가서 먼저 차례 지내라”는 폭탄선언으로 시대를 앞서 가셨다.
박 여사는 요즘 평화롭고 즐거워 보인다. 텃밭에서 기른 무농약 고구마와 검은 콩, 그리고 말린 나물을 5남매에게 보낼 수 있어 행복하다는 엄마. 올 봄 파종할 씨앗들을 구상하신다. 은근히 멋도 부리신다. 못 보던 귀걸이가 귓가에서 살랑대고 예쁜 모자로 동네 패션을 리드하신다. 가장 원통해 하시는 건 평생 연애 한번 못해 본 일. 엄마는 여자였던 것인데, 우리 5남매는 도무지 몰랐었으니.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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