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7.02.06 18:13
수정 : 2007.02.06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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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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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어진의 여성살이 /
우리집 늦돌이가 올해 고 3이 된다. 겨울방학 내내 집 전화는 ‘아무개 어머니’를 찾는 학원들과 과외팀장들의 차지가 돼버렸다. “고3 아들을 두셨으니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시냐?”는 위로성 멘트를 시작으로 온갖 논술팀과 족집게 교습 홍보가 시작된다. 처음엔 예의바르게 거절하다 견디질 못해 아예 집 전화를 받지 않는 지경에 이른다. “사모님 외출하셨어요”라고 거짓말까지 한다. 내 아들이 고3인 게 국가기밀은 아니지만 주민등록 정보는 어떻게 그리 마구 유통되는 것인지? 신문에 끼여 들어오는 전단지들은 수도권 공기 좋은 곳에 있다는 스파르타식 기숙학원 선전이 주종.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
“강남 교육은 아빠의 경제력과 엄마의 정보력으로 이뤄진다”고 한다. 사교육 투자액이 모성애의 증거가 된 지는 오래다. 아이들을 어느 대학에 보냈는지가 엄마라는 직업의 직무평가 기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일까? 아이들의 성적에 올인할 수밖에 없는 엄마들은 고 3 엄마 직업병을 호소한다. 사교육 광풍의 진원지라는 비난도 섭섭하다. 몇십년간 우리 사회는 여성들을 교육시켰지만 일자리 주는 데 인색했다. 엄마와 아내의 지위에 만족해야 했던 여성들 가슴 한 귀퉁이엔 이루고 싶었던 옛 꿈의 희미한 그림자가 있을 터. 명품 아들, 명품 딸을 만들어내려는 교육열은 가정에만 머물렀던 여성들의 좌절된 자기실현 욕구와 맞물려 있다.
용암처럼 분출하는 강남 엄마들의 교육열정을 사회적 에너지원으로 활용할 수는 없을까? 이건 매장량이 무한정한 천연자원이다. 아들딸 외에 그들의 열정을 쏟을 그 무엇인가를 찾아주는 것, 가족의 울타리를 넘어설 만큼 아름다운 동기를 부여하고 프로그램을 만들어 주는 것, 정말 더 늦춰선 안될 일이다. 찾아보면 재밌는 일이 무궁무진하다.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온 유학생 한 사람을 불러 집밥 한 끼 먹이는 호스트 패밀리 인연맺기는 어떨까? 뉴욕이나 유럽의 큰 도시처럼 뚜벅이 관광객들을 위해 ‘반나절 8학군 워킹 투어 가이드’로 뛰어 볼 수도 있겠다. 친정엄마 없는 나라에서 첫아기를 낳는 결혼이민자들이나 여성 이주노동자들의 출산 도우미가 되어주기, 또 아기 예방접종 날 운전해주는 것도 한 방법. 이 나라 교육정책을 좌지우지하는 아줌마의 무소불위 파워로 도대체 안 되는 게 어딨을까?
엄마들의 관심사를 밖으로 돌리기 위해선 남보다 공부 잘하기에 관심 없는 내 아들 같은 녀석들이 잘나가는 세상이 와야 할 것 같다. 청소년답게 적당히 산만하게 자란 아이들이 대박을 맞는 날, 강남 엄마들도 교육 9단에 대한 강박에서 자유로워질까? 아이들의 성적표가 엄마의 성적표인 현실이 빨리 옛날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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