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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7.02.20 19:02 수정 : 2007.02.20 19:02

박어진의 여성살이

박어진의 여성살이 /

겉으론 호탕하게, 속으론 부들부들 떨며 직장을 그만둔 지 1년. 월급쟁이 28년의 흔적은 정장 서른 벌로만 남았다. ‘나인 투 파이브’의 스케줄에 오래 중독되어 있었던 탓일까?

한동안 아침 출근 시간이면 까닭 없이 초조해지는 ‘퇴직 후 금단 현상’을 겪었다. 돈 버는 사람들에 대한 열등감도 생겼다.

반면 나이보다 젊은 척, 건강한 척, 유능한 척 안해도 되니 오십견이 사라졌다. 물론 나는 가난해졌다. 남편이 주는 생활비를 받아쓰는 거, 생각보다 불편하다. 맘대로 쓸 수 없다. 청빈을 숭상하지 않는 터에 본의 아니게 청빈을 실천한다고나 할까.

그나마 염치는 있어 친구들과 여행 갈 때는 내 비자금 계좌를 턴다.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지만.

누구나 가슴 속에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것들의 목록이 있을 터.

차 한 잔 끓여 오탈자 찾아가며 아침 신문을 읽고, 브라질·멕시코 영화를 보러 필름 포럼에 갔다. 오전 11시에 샌드위치와 커피를 마시고 시작되는 백주 대낮 음악회도 가봤고 낑낑대며 등산 코스로 올라 천지 물 한 모금도 마셔봤다. 별 이유 없이 친구들을 집으로 불러 밥 먹는 것도 새로 생긴 취미. 스스로 내건 ‘걷자, 웃자, 놀자’의 구호를 꽤나 성실하게 실천한 셈이다.

슬슬 퇴직 2년차 구상에 들어가야 할 시점. 내 꿈은 마을의 여유분 노동력이 되는 것이다.

어릴 적 이웃에 살던 종대 삼촌을 떠올려 본다. 일종의 ‘잉여 인간’이었던 그는 온갖 허드렛일에 불려 다녔다. 혼인 마당의 차일 말뚝 박기부터 막힌 하수구 뚫기와 초상집 돼지 잡기까지 내가 기억하는 참 많은 풍경 속에 그가 있었다.

늦깎이 살림의 여왕이 되기엔 너무 어수선한 캐릭터인 나. 아무도 내게 살림 솜씨를 기대하지 않으니 부담없이 ‘종대 삼촌’ 버전으로 지금 여기에서 거듭나볼까 한다.

우선 형제자매들 모임이나 친구 모임에 조금 일찍 가서 도우미로 뛰고 동네에서 잠깐 아기 보기 서비스를 론칭할 생각도 해본다. 무료 영어회화 강사를 구한다는 복지관 직원의 말도 솔깃하다. 그간 먼지 쌓인 영어를 다시 꺼내 점검해야겠다. 내친김에 미등록 불법체류 여성노동자들의 상담 도우미 훈련도 받아볼 수 있겠지.

이제부터 내 쓸모는 내가 결정한다. 숨어 있던 잠재능력을 새롭게 발견할 수도 있겠지. 어쩌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능할지도 몰라. 반드시 겸손해야 할 만큼 잘나지도 않았으니 이 또한 자유 아닌가? 나는 진화하고 있다. 지난 50년과 전혀 다르게 살아보겠다는 내 야심, 달성 가능할 것 같다.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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