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 엄마들의 지친 자화상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성애’나 ‘희생’은 젊은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딸들은 외쳤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나의 거부감도 나이가 들면서 많이 희미해졌다. 희생이든, 모성애든 결국 자신의 인생을 가장 충실하게 살기 위한 인간들의 자기 선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영화 <말아톤>의 주제를 장애아를 기른 한 모성의 인간 승리쯤으로 생각하는 데는 찬성할 수가 없다. 오히려 어머니 경숙(김미숙)이 자식을 향한 지나친 모성애를 포기하면서 자폐증 청년 초원(조승우)의 인간승리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경숙이 불편하고 미웠다. 아무리 장애인 아들이지만 자식의 생살여탈권을 독점한 채 몸부림치는 경숙에 대해 부아가 치밀었다. 절망도 희망도 결국은 자기도취로만 보였다. 마라톤에 출전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우리 아들 잘할 수 있지?” 하는 격려의 말에서조차 독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그 경숙에게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을 발견한 것 같다. 영화 <말아톤>의 어머니 경숙은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모습이다. 영화 속에서는 초원이가 마라톤 선수지만 현실에서는 엄마들이 아이를 안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가 된다. 누구도 양육과 육아의 괴로움을 나눠주지 않는다. 인간을 키우는 일을 엄마 한 사람에게 맡겨놓고 오로지 그 결과만으로 순위를 매기는 비정한 사회에서는, 어머니야말로 정신적인 치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 엄마들은 페이스 조절능력을 잃어버린 마라톤 선수이다. 이를 악문 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모든 장애와 한계를 뛰어넘으며 내달리다 보니 어디쯤에서 멈춰서야 할지, 어디쯤에서 아이를 놔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양육에 대한 결정을 오로지 혼자서 내리다보니 그것조차 관성이 되어 누군가 개입할 여지도 없어진다. 엄마는 드디어 세상을 향해 분노어린 코웃음을 친다. ‘흥, 제깟 것들이 뭘 안다고….’ 하면서. 그래서 대한민국은 엄마들이 도 닦기 좋은 나라다. 다음 세대 양육에 대한 어떤 사회적인 합의도, 대안도, 기준도, 안전장치도 없는데 엄마 혼자서 무소의 뿔처럼 꿋꿋하게 가란다. 지독한 경쟁사회에서 경쟁도 초월하란다. 운이 좋으면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또 아닌 거다. 마음마저 비워야 한다. 상황이 이럴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나는 종종 자신에게 되뇌인다. 지금 내가 자식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일 뿐이다. 아이에겐 아이가 추구하고 책임질 가치가 또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가끔 아이와 맞잡은 손을 느슨하게 풀어본다. 박미라/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위원 gamoo21@hotmail.com
여성 |
영화 ‘말아톤’ 속 악바리 모성 |
이 땅 엄마들의 지친 자화상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성애’나 ‘희생’은 젊은 여성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딸들은 외쳤다. 나는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러나 그런 나의 거부감도 나이가 들면서 많이 희미해졌다. 희생이든, 모성애든 결국 자신의 인생을 가장 충실하게 살기 위한 인간들의 자기 선택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부터였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영화 <말아톤>의 주제를 장애아를 기른 한 모성의 인간 승리쯤으로 생각하는 데는 찬성할 수가 없다. 오히려 어머니 경숙(김미숙)이 자식을 향한 지나친 모성애를 포기하면서 자폐증 청년 초원(조승우)의 인간승리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경숙이 불편하고 미웠다. 아무리 장애인 아들이지만 자식의 생살여탈권을 독점한 채 몸부림치는 경숙에 대해 부아가 치밀었다. 절망도 희망도 결국은 자기도취로만 보였다. 마라톤에 출전하는 아들을 앞에 두고 “우리 아들 잘할 수 있지?” 하는 격려의 말에서조차 독기가 느껴졌다. 아마도 그 경숙에게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을 발견한 것 같다. 영화 <말아톤>의 어머니 경숙은 과거 우리 어머니들의 모습이면서 동시에 나 자신의 모습이다. 영화 속에서는 초원이가 마라톤 선수지만 현실에서는 엄마들이 아이를 안고 달리는 마라톤 선수가 된다. 누구도 양육과 육아의 괴로움을 나눠주지 않는다. 인간을 키우는 일을 엄마 한 사람에게 맡겨놓고 오로지 그 결과만으로 순위를 매기는 비정한 사회에서는, 어머니야말로 정신적인 치유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별로 없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 엄마들은 페이스 조절능력을 잃어버린 마라톤 선수이다. 이를 악문 채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모든 장애와 한계를 뛰어넘으며 내달리다 보니 어디쯤에서 멈춰서야 할지, 어디쯤에서 아이를 놔주어야 할지 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양육에 대한 결정을 오로지 혼자서 내리다보니 그것조차 관성이 되어 누군가 개입할 여지도 없어진다. 엄마는 드디어 세상을 향해 분노어린 코웃음을 친다. ‘흥, 제깟 것들이 뭘 안다고….’ 하면서. 그래서 대한민국은 엄마들이 도 닦기 좋은 나라다. 다음 세대 양육에 대한 어떤 사회적인 합의도, 대안도, 기준도, 안전장치도 없는데 엄마 혼자서 무소의 뿔처럼 꿋꿋하게 가란다. 지독한 경쟁사회에서 경쟁도 초월하란다. 운이 좋으면 목적지에 도달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또 아닌 거다. 마음마저 비워야 한다. 상황이 이럴수록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나는 종종 자신에게 되뇌인다. 지금 내가 자식에게 주입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내 인생에서 중요한 가치일 뿐이다. 아이에겐 아이가 추구하고 책임질 가치가 또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가끔 아이와 맞잡은 손을 느슨하게 풀어본다. 박미라/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위원 gamoo21@hotmail.com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