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05.03.30 18:24 수정 : 2005.03.30 18:24

‘수의당 주옥경’출간
파란만장한 삶 조명

“참말 우리 여자들은 여태까지 맹목적 신앙이었습니다. 남자의 지배만 받아 단순히 가장이 있으니까 자기도 있다는 외에는 아무런 주의도 주장도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알아야 하겠습니다. 알려면 배워야 하겠습니다.”(1924, 주옥경 종법사)

민족 전체가 암울했던 일제 강점기, 누구보다 먼저 희생을 요구당했던 여성들의 권익향상에 목소리를 높이던 한 여성의 일대기가 최근 선보였다. 천도교여성회본부가 창립 81주년을 맞아 펴낸 <수의당 주옥경>(김응조 지음). 이 책은 여염집 딸로 태어나 기생으로 살다가 천도교 최고의 예우직인 종법사에까지 이른 수의당 주옥경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그리고 있다. 수의당은 천도교 제3대 교조이자 독립운동을 이끈 민족지도자 의암 손병희 선생의 부인이기도 하다.

남편의 그늘에 가려 잘 알려지지 않았던 그의 삶은 실로 대단히 극적이었다. 1894년 평양 부근 촌락에서 태어난 그는 집안 형편이 여의치 않은 탓에 8살 어린 나이에 기생학교에 들어갔다. 19살부터 독립운동가들이 주로 드나들던 서울의 유명한 요리집인 명월관에서 기생 생활을 시작해 기생조합을 만들어 수장인 향수를 맡기도 했다. 22살 나이에 그는 의암 손병희 선생을 만나 처음으로 천도교와 마주한다. 8년간의 결혼생활과 긴 옥바라지 끝에 1922년 손병희 선생과 사별하고 난 뒤엔 천도교 최초의 여성단체를 만들며 초대 회장이 되었다. 31살이 되어서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3년간 영문학을 공부하기도 했다.

비록 남편에게 배움을 얻어 그를 한 사람의 남자이자 더불어 스승으로까지 여기며 존경했지만 그는 결코 자신을 잃지 않았다. 여성인 자신의 정체성을 폄하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려니와 같은 여성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려고 애썼다. 그가 평생을 두고 고민한 문제가 바로 여성의 문맹타파와 생활개선. 여성들에게 생활이 불편하면 저고리 옷고름을 떼내버리고, 남성에 필적하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 여성들도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다. 82년 유명을 달리할 때까지 수의당은 줄곧 여성의 배움과 실천을 강조하며 남녀평등을 부르짖었다.

천도교는 남녀와 장유의 차별이 없이 절대평등하다는 이념을 중요하게 여기는 종교다. 2대 교주인 해월신사는 심지어 “여자 한 명이 남자 천 명을 살린다”고 할 만큼 여성의 역할을 강조하기도 했다. 수의당 역시 이에 따를 뿐이었다. 그는 교회의 여성 차별을 일컬어 “의무는 있으면서 권리가 없었고, 입은 있어도 말할 길이 없었고 노력은 있어도 보상이 없는 현상”이라며 “여성문제를 너무 미지근하게 혹은 무관심해서 방치해오는 것”이라며 일갈하기도 했다. 반세기 가까이 천도교여성회를 이끌어온 그는 경운학원 원장, 민족대표 33인 유족회장, 광복회 부회장 등을 지내다 지난 82년 타계했다. 천도교는 그의 공적을 받들어 71년 천도교 최고의 예우직인 종법사로 추대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