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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4.27 17:47 수정 : 2005.04.27 17:47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다시 봤다. 가정과 가문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애쓴 여자의 이야기를 가족의 달을 맞아 본다 하는 구태의연한 생각 따윈 없었다. 그저 디브이디를 볼 기회가 있었다. 중학교 3학년 이후 극장에서만 3번, 텔레비전에서도 여러번 본 영화다.

낡지 않는 영화라는 게 있나보다. 처음 영화를 볼 때 사춘기 소녀였던 관객이 청춘을 거쳐 중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됐는데도 영화는, 새롭다. 비비안 리는 현대의 어떤 여배우보다 매혹적이고 그가 입고 나오는 드레스는 구닥다리라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녹색이 많이 들어간 드레스들은 오십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세련돼 보이고 모자들은 독창적이다. 하얀 블라우스와 주름 스커트가 짝을 이룬 교복을 입고 똑같은 디자인의 책가방을 든 소녀들이었던 나와 친구들이 영화가 끝나고 스칼렛이 그랬듯 서로의 허리를 재던 기억이 난다.

청춘 시절에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우유부단하지만 부드럽고 지적인 애슐리와 태풍처럼 강렬한 레트 버틀러. 사랑을 놓치고서야 사랑을 아는 스칼렛이 안타까웠던가. 그리고 조금 더 지나서는 세상에 사랑 밖에 없는 것처럼 구는 스칼렛이 한심해보였다. 남북전쟁, 노예해방, 지주와 자본가….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뒤엉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혼돈과 격랑의 역사 속에서 자신의 것만 지키고자 하는 한 여자의 욕망이 비루해보였다. 그 후로 더 이상 이 영화를 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영화를 보며 나는 비루하다고 생각했던 그 욕망에 가슴이 설다. 스칼렛이 따라가는 욕망은 이 지상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것으로 확신하는 보물섬의 지도마냥 매혹적이다. 어떤 영화가 여자의 욕망을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다룬 적이 있었던가.

영화 초반부, 남북전쟁이 터졌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파티를 벌이던 사람들이 흥분하여 집 밖으로 달려 나가는 장면이 있다. 사랑고백에 실패한 스칼렛은 혼자 계단을 올라간다. 다들 소리를 지르며 미친 듯이 아래층으로 내려갈 때 그는 오직 자신의 사랑에 관한 생각만 하며 사람들과는 반대방향으로 거슬러간다. 영화 내내 스칼렛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다. 남편을 잃고 검은 상복을 입고서도 날아갈 듯 춤을 추고, 타라를 살리기 위해 동생의 남자친구와 결혼을 하고, 남의 남자가 된 애슐리를 유혹하고. 마침내 영화의 마지막 장면, 레트 버틀러가 떠날 것을 결심하고 스칼렛에게 얘기한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소?” 스칼렛이 대답한다. “아니요. 몰라요. 내가 아는 건 오직 당신을 사랑하는 것 뿐.” 그러자 레트 버틀러가 말한다. “그게 문제요. 당신은 늘 당신 자신 밖에 모르지.” 예나 지금이나 여성이 욕망을 따라 사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니어서일까. 세상의 시선과 가치를 가볍게 밀쳐내고 욕망의 미로를 헤쳐 나가는 여자 주인공은 열여섯의 소녀에게도 사십이 다 된 지금의 나에게도 늘 아슬아슬하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욕망에 따라 삶을 사는 여자, 스칼렛은 여전히 유효하며 새롭다.김현아/ ‘나와 우리’ 운영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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