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05.05.11 17:36
수정 : 2005.05.11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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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을 낳고 보살피는 여성의 영성을 다시 한번 돌아보자는 의미에서 열린 ‘생명운동과 페미니즘’ 워크숍 한 장면. 행사에서 아이 아빠가 산모의 발을 씻겨주고 있다. 사진 생명과 평화의 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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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생명문화포럼’ 제1차 워크숍 열려
만화가 장차현실씨 주인공…산모·새생명 축복 퍼포먼스
젊은 시절 한때 여성들에게 ‘운동권 남성우월주의자’로 불리던 남성 생명운동가들과 그런 남성들에게 ‘급진적 여권운동가’라고 지탄받던 페미니스트들이 한 자리에서 만났다. 서로 생각이 달랐던 이들이 만난 이유는 ‘생명’과 ‘살림’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지난달 29~30일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토지문화관. 사단법인 ‘생명과 평화의 길’(이사장 김지하)이 올 9월에 여는 ‘세계생명문화포럼 2005’를 앞두고 마련한 제1차 워크숍이 만남의 장으로 펼쳐졌다. 워크숍의 주제는 ‘생명운동과 페미니즘’. 64억 인류가 평화롭게 더불어 살려면 생명을 돌보고 보살피는 여성의 영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마련한 행사였다.
둘쨋날 아침 절수행과 명상으로 고요히 몸과 마음을 가다듬은 참석자들은 생명환영식을 준비했다. 이 행사는 생명 탄생의 의미를 되새기고 산모와 새 생명을 축하하는 퍼포먼스이자 이번 워크숍의 고갱이. 곧 태어날 아이를 위한 용품들을 챙겨주는 서양의 ‘베이비 샤워’와 비슷하다. 행사의 목적은 ‘선물’이 아닌 ‘축복’.
이날의 주인공 산모는 만화가 장차현실씨.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딸과 함께 살아가는 한 부모 이혼 가정의 이야기를 만화로 그려 유명한 이다. 만삭의 산모가 등장하자 사람들은 그의 머리와 옷에 꽃을 달아주며 축복의 마음을 전했다. 무대를 둘러싸고 앉은 남녀노소 참가자들은 기타 반주에 맞춰 콧노래로 산모와 태 안의 아이를 축복했다. 태아의 아빠는 양산을 들고 내리쬐는 봄볕을 가렸다.
“아이와 산모를 위해 사랑의 마음을 담아 발을 씻겨드리겠습니다.” 산파가 꽃과 허브로 채운 따뜻한 물을 들고 들어왔다. 아빠가 산모의 발을 씻겨주자 친구들은 그 발에 향유를 바르고 준비해 온 선물과 축복의 인사를 건넸다.
“아이가 태어나 자신이 받은 축복을 알게 되면 모든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장차현실씨는 “아이가 작고 무리하면 안 되는 상황이라 장거리 여행이 조심스러웠는데 환영식을 하면서 뱃속 아이가 편안해하는 것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만화의 등장인물처럼 다운증후군 장애를 가진 딸 은혜는 동생을 축복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다가 “아이가 태어나면 내가 잘 키울 것”이라며 “엄마가 좀 쉬어야 하는데 쉬지 않는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생명환영식을 이끈 강도은씨는 “아메리카 인디언 나바호족의 제례를 본따 우리식으로 만든 행사”라며 “곧 어머니가 될 여인이 출산 과정에서 진정한 생명의 신비와 여성 내면의 힘을 깊이 체험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함께 그 여정을 지지하고 힘을 주는 의례”라고 밝혔다.
행사 뒤엔 ‘21세기에 호출되는 황진이의 삶과 노래’라는 주제로 박정애 교수(삼척대 문예창작학)의 강연이 이어졌다. 그는 황진이를 “유교적 가부장제와 신분제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간, 풍류, 선도 사상의 맥을 이어가는 사람”으로 평가했다. ‘죽은 뒤 묻지 말고 동문 밖에 시체를 버려 버러지와 동물들로 나의 몸을 먹게 해 천하 여자들의 경계로 삼으라’고 한 황진이의 유언에 대해서도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박 교수는 “황진이의 유언에서 뉘우침과 도덕적 책임의식 같은 것보다는 어머니로서의 기능적 정체성에 갇힌 세상의 뭇 여성들에게 스스로를 돌아볼 것을 요구하는 강력한 암시를 느낀다”며 “주검이 벌레들에게 먹혀 무기물로 분해되었다가 다른 생명의 몸을 이루는 생명의 순환구조를 일찍 깨달은 자의 달관도 엿보인다”고 설명했다.
이밖에도 행사에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첫날 60여 명의 참가자들은 ‘우리 시대에 다시 쓰는 새로운 우주 이야기’(고혜경 가톨릭대 겸임교수)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만물에 깃든 우주적 에너지를 되새겼다. 고 교수는 “우주의 역사는 136억년, 지구의 역사는 46억년, 인류의 역사는 400만 년인데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발생을 중심으로 역사관을 전개해 왔다”며 “인간중심적 세계관을 탈피하여 심오한 우주의 시간으로 시야를 확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생명과 평화의 길 김영동 조직위원장은 “페미니즘의 생명인식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자리였다”고 자평하며 “앞으로 한류와 세계문화, 동아시아의 문예부흥, 동아시아 생명사상과 한국 생명학 등에 대한 워크숍을 이어갈 것”이라고 밝혔다. 생명문화포럼은 오는 9월2일부터 5일까지 경기도 파주출판단지에서 열린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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