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식자리 ‘성희롱’ 이렇게 대처를 “회식자리에서 치욕적인 일을 당했습니다. 부장이 술을 따르라고 한 데 이어 동료 남자직원들까지 자기 술잔이 비었다며 저를 지목해 술을 따르라고 했습니다. 분위기상 따를 수밖에 없었는데 며칠 동안 잠을 설칠 만큼 자괴감이 심했습니다.” “평소 순한 양의 얼굴을 하고 있는 상사가 술만 먹으면 X가 된다는 소문만 듣고 피하고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회식자리에 가게 됐습니다. 어깨에 손까지 올려가며 놀려고 하는데 너무 억울해 며칠을 울었습니다. 인사에서 당하는 불이익은 그렇지만 조직 내 따가운 시선이 두렵습니다.” 최근 한국여성민우회에 들어온 직장 회식자리 성희롱에 대한 글이다. 최근 서울고등법원은 회식자리에서 교감이 여교사에게 술을 따르라고 한 행위는 성희롱이 아니라고 판결했다. 이에 여성·시민단체는 피해자의 처지를 고려하지 않은, 시대를 거스르는 판결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기실 회식자리 성희롱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 한해 동안 한국여성민우회가 접수한 직장내 성폭력 510건 가운데 성희롱은 23.3%를 차지한다. 임신·출산관련 상담에 이어 가장 많다. 또 그 가운데 절반 정도는 회식자리 성희롱에 대한 상담이다. 전문가들은 회식자리에서의 성희롱이 억압적이고 위계적인 조직문화의 파생물이라고 지적한다. 권혁범 대전대 정치학과 교수는 “회식 자리에서는 ‘나이 어린 여자’에 대해 이중적 억압이 나타나기 쉽다”고 말했다. 권력을 우위에 둔, 위계질서가 같은 남성들끼리도 억압하는 자리인 데다 술을 마시면서 성차별 문화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직장 술자리는 공적자리 연장…‘강권’ 행위 위계질서 따른 억압
말 통하는 남녀동료 함께 ‘연대’…끼워앉기·술따르기 등 막아야 거부 의사를 밝혔음에도 술따르기나 일명 ‘폭탄주’와 ‘충성주’(맥주잔 위에 젓가락을 걸치고 양주잔을 올려 놓은 뒤 식탁을 이마로 들이받아 양주잔을 빠뜨린 뒤 먹는 폭탄주의 일종으로 ‘마빡주’라고도 한다) 등을 따르고 마시길 강권하는 행위 자체를 위계질서에 따른 억압으로 보기도 한다. 여성학자 박혜란씨는 “회식 자리 술문화는 권력, 나이, 성차별 문제가 공고하게 구조화된 집단 문화”라며 “남녀를 떠나 권력을 이용해 부당하게 원치 않는 일을 강요하거나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은 폭력”이라고 말한다. 회식자리가 사적인 자리 같지만 실은 공적인 자리의 연장선으로 권력과 서열의 관계가 여전히 통용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박씨는 “당사자가 수치심을 느꼈다면 분명 성희롱”이라며 “그 불쾌한 감정이 관행이란 이름으로 묻히기 쉽다”고 말했다. 이번 사건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재판부 1·2심 결정문의 핵심은 교사 회식자리에서 여교사에게 교감이 술따르기를 권한 것은 미풍양속과 관행상 용인될 수 있는 풍속이기 때문에 가해자가 성적 의도는 없었다는 것. 이 판결에 대해 여성·시민단체는 재판부가 권력관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며 “성희롱에 면죄부를 주고 전근대적인 위계질서가 ‘예절’과 ‘미풍양속’이라는 이름으로 치장되고 있다”고 비판한다. 회식자리 성희롱을 미연에 방지하려면 ‘고위험 상사군’을 파악하는 것이 좋다. 직장내 ‘마초’로 평판이 높은 이들을 경계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다. 여성처세서 <비굴클럽>의 저자 김정선씨는 “회식자리에선 여성이 비굴해서도 안 되지만, 상사의 명령을 거부하면서 얼굴이 붉어져도 관계를 복원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고 강조했다. 혼자 회식술자리 문화를 바꾸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해볼 만한 것은 ‘연대·지원전술’을 펴는 것이다. 김씨는 △술자리 평판이 좋지 않은 직장 상사, 동료들을 사전에 미리 파악할 것 △말이 통하는 남자 동료나 여성 동료들끼리 지원군을 형성할 것 △지원군들은 술자리에서 연대해 술자리 끼워앉기, 블루스 추기, 술따르기 강요 등을 막을 것 △술자리 이야기를 남녀문제로 흐르지 않도록 연대전선을 만들것 등을 권했다. 일단 성희롱을 당했다면 먼저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필요하다. 이런 절차를 밟거나 공론화시킬 때 흔히 부닥치는 것이 성희롱을 문제삼는 피해자를 대하는 동료들의 따가운 시선이다. 다른 피해자나 동료와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한 뒤 공동대응하는 편이 좋다. 사건에 대응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면 회식자리에서 있었던 일들을 낱낱이 기록해둔다. 언제, 누가,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등 육하원칙에 따라 기록한 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로부터 확인을 받아 당사자에게 공식적인 사과, 혹은 사과문을 요청하고 재발방지 각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재발했을 때 사업주에게 공식적으로 문제를 제기하겠다고 밝혀두는 것도 유용하다. 이런 요구에도 아무런 조처가 없다면 사업장내 노동조합이나 상사 또는 기관에게 직접 징계를 요구하면 된다. 남녀고용평등법상 사업주는 직장내 성희롱의 예방을 위한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성희롱 발생이 확인된 경우 지체없이 행위자에 대하여 징계, 그밖에 이에 준하는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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