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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6.21 17:17 수정 : 2005.06.21 17:17

아주 드물게 남편을 세미나 같이 공식적인 장소에서 마주칠 때가 있다. 누군가와 이야기에 빠져 있는 그의 옆얼굴은 낯설다 못해 모르는 사람 같다. 그가 입은 양복은 분명 낯이 익은데 평소 지나치게 익숙한 그에게서 거리감을 느낀다. 당황스러운 ‘시츄에이션’.

이 사람은 그저 내 남편이다. 일요일 아침 느지막이 일어나 책을 읽다 내가 땀흘리며 차려낸 밥상에 앉는 남자. 국을 퍼담고 가스불 위 간고등어가 탈까 노심초사하며 뒤적이고 김치를 썰어 내는, 현란한 ‘멀티태스킹’을 발휘할 때도 수저조차 놓을 줄 모르는 남자. 설겆이를 봉사라고 생각하는 남자. 그저 무심히 벗은 파자마를 옷장 속에 아무렇게나 찔러 넣는 남자. 읽고난 책이나 쓰고난 공구를 태연히 늘어놓고 잊어버리는 남자. 그래서 종합적으로 얄미운 남편. 그런데 공식적인 자리에서 만나는 남편의 모습은 얄밉지도, 친근하지도 않다.

이미 둘 사이가 혈육처럼 돼버린 탓일까. 우리는 흔히 결혼이 한낱 사회계약이었음을 잊고 산다. 대신 ‘부부일심동체’라는 판타지를 신봉한다. 합법적 결혼과 동시에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한 마음, 한 몸이 된다는 이 옛말은 사랑과 결혼이라는 복잡다단한 프로그램을 몽롱하게 덧칠한다. 그런데 이건 진실일까?

결혼한 우리는 말 안해도 나의 외로움과 고통을 상대가 다 알아주기를 바란다. 말 안해도 모든 걸 척척 도와주고 원하는 걸 제공해 줄 것만 같은 과잉기대를 불러 온 원흉, 그건 바로 ‘부부일심동체’라는 강박 또는 희망사항이 아니었을까? 결혼 22년 차의 경력으로 본 결혼의 현실은 오히려 크고 작은 전투일지에 가깝다.

나이 서른에 결혼했던 내게 직장 선배 한 분이 “남편을 네 이웃처럼 사랑하라”는 말을 해주셨다. 처음엔 황당한 축하 멘트로 들렸다. 어떻게 남편을 이웃처럼 대할 수 있을까? 남편을 내가 독점계약 맺은 남자로 믿었기에 나는 그에게 많은 걸 기대했고, 상처받고 미워했다. 기대는 번번히 충족되지 않았으므로.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자해였다. ‘우리는 하나다’라고 생각지 않았다면 섭섭하지도 않았을 사소한 일에도 나는 분노했었으니 말이다.

오십이 되고서야 그 선배 말씀의 깊은 뜻을 알겠다. 너무 뜨거워 서로에게 화상을 입히지 말고, 은은한 온기로 오래 사랑하라는 뜻. 그간 잃어버리고 잊어버렸던 ‘거리’ 감각을 회복하고 싶다. 그를 내 남편이기 이전에 한 독립된 인간으로 바라보는 좋은 이웃이 되고 싶다.

박어진/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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