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덕 재조명 활발 뛰어난 경영자 평가 넘어
나눔 정신·주체적 삶 초점
“새 화폐의 여성 인물” 주장
애니메이션·드라마등 추진도 “김만덕을 단순한 여성 시이오로 봐선 안 된다. 그가 살았을 때 영국에서는 자본주의가 태동했다. 만덕은 그 시절에 이미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문제를 극복할 대안까지 몸소 실천했다. 그를 위기에 처한 인류문명을 구할 새로운 문명의 상징으로, 세계적 인물로 만들어야 한다.” (김재희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김만덕은 조선 정조 시대에 살았던 실제 인물이다. 그 시대 제주 제일의 상인으로, 제주에선 기근에 허덕이는 사람들을 먹여살린 ‘나눔 할망’ 또는 ‘구휼 할망’으로 잘 알려져있다. 제주 4·3연구소 박찬식 연구위원은 “예부터 제주에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만덕 할망처럼 남을 도우면서 살아라’는 이야기를 해왔다”고 전한다. 최근 김만덕에 대한 재평가가 여성계와 제주 학계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지난달 28일 국회에서 열린 새 화폐 도안 토론회에서는 김만덕을 새 화폐의 여성 인물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 있게 제기됐다. 에코페미니스트 김재희씨와 만화가 장차현실씨는 <고래소녀 만덕>이란 만화를 한 어린이 만화 교양지에 연재했고, 최근 발간한 어린이책 <아름다운 위인전>(한겨레아이들)에도 김만덕의 이야기가 첫번째로 실렸다. 일부에선 만덕에 대한 문화콘텐츠 사업으로 애니메이션 제작 등도 거론하고 있다. 제주 출신 탤런트 고두심씨가 공동대표로 있는 (사)김만덕 기념사업회에서는 고두심씨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 기획을 추진중이다. 특히 지난 9일 제주 그랜드호텔에서 (사)김만덕 기념사업회가 연 ‘김만덕 기념 전국 학술 세미나’에서는 김만덕의 행적을 되짚고, 문화콘텐츠 산업으로 이어가자는 주장이 쏟아져나와 눈길을 끌었다. 제주대 윤리교육과 변종헌 교수는 발표문에서 김만덕을 “18세기 주변부 여성의 삶을 뛰어넘어 유교 사회 중심부에서도 인정받는 여성이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김만덕이 제주에서 가장 큰 부자가 된 데다,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남에게 전 재산을 내놓았던 ‘나눔 정신’을 가진 여성이었음을 강조했다. 또 그가 유교질서를 뚫고 성공한 여성 사업가였을 뿐만 아니라 남성 못잖게 주체적인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풀이했다. 변 교수는 이에 대한 근거로 △기생이었던 만덕이 20살 때 관가에 직접 호소해 기적에서 이름을 없앤 점 △한 남성을 선택해 가부장의 구도 속에 안주하고 보호받길 거부하면서 평생 결혼하지 않은 점 △객주를 운영하면서 제주도 물품과 육지 물품을 교역하는 유통업에 뛰어들었던 점 △제주 여성이 뭍에 나가선 안 된다는 출륙금지령을 뚫고 궁궐과 금강산 구경을 한 점 등을 들었다. 변 교수는 “만덕이 정조의 명에 따라 소원을 말하라고 했을 때 남성들조차 구경하기 어려운 궁궐과 금강산 구경을 하면서 무형의 자산에 투자하는 모습은 남성들조차 가지기 어려운 진취적인 사고”라고 설명했다. 제주대 사학과 문혜경 교수는 만덕에게서 제주도의 ‘조냥정신’을 봤다. 조냥정신은 근검·절약정신을 가리키는 제주도 특유의 생활정신이다. 문 교수는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면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는 만덕의 생활정신은 제주 여성의 정신 그 자체”라고 해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김만덕의 이야기를 문화 콘텐츠로 만들어 대중에게 알리면서 경제적인 이윤 창출로 이어가야 한다는 주장도 함께 제기됐다. 고려대 국문학과 정창권 초빙교수는 김만덕 콘텐츠 개발과 제주 경제의 활성화 방안을 내놓았다. 그는 김만덕에 대한 문화 콘텐츠 개발로 단행본, 출판만화, 전시, 공연, 애니메이션, 게임 등의 방법을 제시했다. 김만덕이란 200년 전 살았던 인물을 재조명하는 데 그치지 말고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인류를 구원할 새로운 인간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 심지어 김재희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인(<고래소녀 만덕> 작가)은 ‘만덕 할망’의 이야기를 재구성해 현대문명의 병폐를 극복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절대신, 유일신, 심판자, 창조주가 아니라 삶과 죽음을 가르지 않는 삼신할망 또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존재의 신을 만들어야 한다”며 보살핌의 문명, 생명의 문화를 새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제주전통문화연구소 문부병 소장 역시 “김만덕 할머니의 이야기는 이미 신화가 되고 있으니 제주도를 대표하는 여신으로 신격화해도 좋을 만큼의 의미가 있다”며 김 편집인을 거들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기생 삶 스스로 벗어나…재산 털어 흉년 구휼 김만덕의 행적은 정조 때 남인의 거두였던 채제공이 쓴 <만덕전>으로 알려졌다. 그 외 <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도 만덕의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따르면 만덕이 기녀 출신으로 큰 재산가가 되었고, 대기근 때 쌀을 사들여 백성을 구휼한 뒤 출륙금지령(제주 여인은 뭍에 나갈 수 없다는 법령)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허락을 얻어 한양 궁궐과 금강산 구경을 했다고 한다. 금강산 관광 가이드들이 지금도 만덕의 이야기를 관광객들에게 전할 정도로 그의 금강산 기행은 유명하다. 양인으로 태어난 만덕은 전염병으로 부모를 잃은 뒤 수양딸이 된 기생의 집에 살면서 기적에 이름을 올렸다고 한다.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기생이 되었던 까닭에 20살 때 관아에 찾아가 절박한 호소 끝에 기적에서 이름을 뺄만큼 당찬 구석도 있었다. 기생의 삶을 포기한 뒤에는 상인으로 모습을 바꾼다. 18세기 조선은 전국적으로 유통망이 갖춰지던 시기. 해상 교통의 중심인 포구에서 객주를 차린 만덕은 제주의 양반층 부녀자들에게 육지의 옷감과 장신구, 화장품 등을 팔고 제주 특산물인 미역, 전복, 표고, 말총, 녹용, 귤 등을 육지에 팔아 시세차익을 남겼다고 한다. 여성으로선 드물게 자신의 포구와 선박까지 소유하며 큰 장사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유명해진 건 구휼활동 때문이었다. 4년여에 걸친 흉년으로 제주민들이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고, 조정에서 보낸 곡물운반선이 침몰하자 그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육지에서 쌀 500여석을 산 뒤 50여석은 친척에게 나눠주고 450여석으로 1100여명의 제주도민(당시 제주도민의 2/3)을 먹여살렸다. 그의 빈민구제 활동을 전해들은 정조가 소원을 묻자 궁궐 구경과 금강산 기행을 원해 이루게 됐다. 그 뒤 6개월 동안 한양과 금강산 등지를 돌며 숱한 대관들을 만나고 교류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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