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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05.09.07 10:55 수정 : 2005.09.07 13:36

전복죽이 먹고 싶었다. 느닷없는 일이다. 어른들이 편찮으실 때나 아이들이 입맛을 잃었을 때 아주 가끔 끓이곤 했었다. 심리적 효과까지 겨냥한 특단의 조처라고나 할까. 나를 위해서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이런 ‘럭셔리 메뉴’를 앉아서 받아 먹을 수 있는 여성은 정2품 내명부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을 우리 시대 귀부인들이려니.

동네 죽집을 떠올려 봤지만 성에 차질 않는다. 별 수 없이 마을 버스편으로 가장 가까운 백화점 식품부에 행차. 부들부들 떨며 아이 손바닥 만한 전복 3개를 3만원에 사왔다. 머릿속에 과소비주의보가 즉각 발효되었지만 무시했다. 평소답지 않은 나의 대범함이여! 급히 쌀을 불리고 전복을 큼직하게 썰어넣었다. 그득한 냄비를 주걱으로 저으며 이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지 궁리에 급급했다. 묘수가 떠오르질 않는다. 에라 모르겠다. 소금간을 맞추고 참기름도 듬뿍, 군침이 돈다. 아이들이 돌아 오길 기다리질 못하고 결국 혼자 듬뿍 한 대접을 퍼 식탁에 앉았다. 입안 가득 퍼지는 행복. 그런데 웬일? 눈물이 핑 돈다.

나이 오십에야 나 자신을 위해 전복죽을 끓일 수 있다니, 기막힌 일이 아닌가? 남편과 어른들,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서만 전복죽을 끓이라고 헌법과 법률에 명시된 것도 아니다. 그들을 먹이려 끓이는 건 정당하고 막상 내 자신을 위해서는 이렇게 어색하다니. 내가 먹고 싶어 끓인 전복죽 한 그릇의 명분을 찾느라 급급하고 있질 않은가?

어찌 전복죽 뿐일까? 결혼 전엔 비싼 옷도 가끔 사입던 나였건만 결혼 후엔 백화점의 재고 처리 좌판들과 더 친해졌다. 처녀 때 비싼 정장 사느라 들인 돈이 뒤늦게 후회까지 될 정도였으니. 그만큼 생활의 우선 순위, 쇼핑의 우선 순위가 재조정되었던 것이다. 스스로 대견스럽게 생각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혼자만 손해보는 것 같은 느낌, 억울하다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이다. 어느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었건만 남편과 아이들을 우선 순위에 놓고 산 것이 때로는 쓸쓸하게 느껴지다니. 내 옷 사러 가서 남편 옷 대신 사온 날은 빛나는 주부 정신을 스스로 칭송해야 할지 우선 순위 명단에서 나 자신을 끌어내린 결단을 후회해야 할지 헷갈렸다. 어찌 나만의 일일까? 또래 친구들도 주부우울증이란 이름의 ‘서운섭섭증’을 지병으로 달고 산다. 이 병은 지속적 헌신에 대한 보상을 은연중 기대하나 충족되지 않을 때 발병한다.

전복죽 한 냄비를 몽땅 내가 먹을 생각이다. 남편과 아이들을 상전처럼 모시고 살아오는 시간 속 알게 모르게 내 안에 자란 섭섭증과 억울한 마음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사소한 섭섭증이 쌓여 생긴 원망이 발암물질화 하는 걸 막으려면 지금 나 자신을 위하고 아껴주는 퍼포먼스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다.

박어진/ 자유기고가 behappym@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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